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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고전

Jimi Hendrix-전대미문의 폭발적 사운드

불멸의 기타리스트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아티스트는 바로 지미 헨드릭스이다. 록이란 장르에서 기타라는 악기와 기타리스트의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다. 기타라는 악기가 이러한 지휘를 얻기까지 지미 헨드릭스의 공로 또한 절대적이다. 누가 지미 헨드릭스가 록음악과 기타사에 한 공헌을 이런 식으로 예기한 적이 있다. 지미 헨드릭스 이전의 음악만 골라 듣다가 지미헨드릭스의 음악을 들어보라고…

지미 헨드릭스는 록앤롤의 징글거리는 기타에서 인간의 야수성을 담아낸 거친 호흡을 표현하는 기제로 바꾸어놓았다. 사실, 기타가 이전의 음악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것은 작은 음량 때문이었다. 전기 기타가 발명되면서 이러한 작은 음량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앰프의 볼륨을 키울 때 형성되는 지저분한 음색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오히려 이러한 디스토션이 가지는 가능성을 파악했다. 지금은 이펙터를 통해 보다 쉽게 만들어지고 있고 또한 보편화된 사운드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협화음보다는 불협화음에서 오는 파격적인 구성을 통해 새로운 사운드의 틀을 구축했다. 그리고 피드백을 통한 소리의 이음, 와와를 통한 기타톤의 미묘한 조절또한 과격한 아밍이나 드라마틱한 투쓰(tooth)피킹과 같은 격정적인 연주기법 등 지금은 일반화된 전기기타의 모든 가능성 들이 그에 의해 정립되었다. 물론, 후의 피트 타운젠드나 야드버즈 시절 제프벡이 피드백 등의 가능성을 보았으나 그들의 것은 단지 가능성의 차원이었다. 또한, 그의 피킹과 핑거링은 의미없이 흘려버리는 것 같지만 격정적이고 또한 치밀한 계산에 의해 정돈된 전개를 펼친다. 그의 작법은 기본적으로 블루노트 펜타토닉에 기반한 강렬하고 격정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시대적 환경에 기반한 것이다. 67년의 사이키델릭의 전성 시태에서 블루스 리바이벌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사이키델릭과 블루스가 가지는 에너지와 창조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블루스록에 지미 헨드릭스는 사이키델릭한 영감에서 온 진보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은 사이키델릭과 블루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당시의 어느 기타리스트보다 재즈적인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재즈적 즉흥성을 록에 순간적 폭발력을 불어넣는 데에 사용하였다. 이는 점층적으로 에너지를 축적해 나가는 에릭클랩튼과 달리 계산된 프레이즈이지만 청자에게 예상 밖의 강렬함을 경험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지미 헨드릭스는 재즈적 성향이 강한 아티스트였지만 지미 헨드릭스의 강렬한 즉흥성은 마일즈 데이비스 등 재즈 아티스트 들이 퓨전 재즈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 노트를 보면 바그너의 음악이 가지는 풍성한 사운드에 대해 언급해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바그너 식의 풍성한 사운드와 극적인 전개를 자신의 악곡에 적용했던 것이다. 두터운 사운드와 극적인 스테이지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이후 숱한 추종자들이 따랐지만 그 누구도 지미 헨드릭스적인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사운드 메이킹은 지금까지도 신선한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가 발표한 정규 앨범은 노엘레딩과 미치미첼과 함께한 지미 헨드릭스 익스퍼리언스와 밴드 오브 집시에서 발표한 1장의 앨범 뿐이다. 단 3장의 앨범은 모두 록 역사상 바이블과 같은 지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시애틀의 평범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세 때부터 기타를 배워 조그만 밴드에서 연주를 하며 로버트 존슨, 무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B.B.King등을 카피해갔으며 17세 군에 입대했다. 부상으로 제대한 이후 63년까지 리틀 리차드 등의 반주자로 공연 활동을 하게 되며 흑인 아티스트와의 접촉을 통해 리듬 앤 블루스를 뿌리 속 깊이 익혀나간다. 보컬 실력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밥딜런의 노래를 듣고 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후 지미 헨드릭스는 뉴욕으로 옮겨 Jimmy James & The Blue Flames라는 밴드를 구성하여 블루스르 연주했다. 이 때 벌서 지미 헨드릭스는 피드백을 실험하고 있었고 존 하몬드 주니어의 밴드 기타리스트로 뽑히게된다.

영국 밴드 애니멀스의 베이스 주자 채스 챈들러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영국행을 권했다. 채스 챈들러를 통해 두명의 아티스트를 소개 받게 된다. 베이시스트 노엘 레딩은 처음에는 기타리스트였으나 지미를 보고 바로 베이스로 바꿨다. 또한, 드러머 미치 미첼을 만나 크림과 함께 최고의 수퍼 트리오로 꼽히는 지미 헨드릭스 익스퍼리언스를 결성한다.

영국에서 풍부한 음악적 풍토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적 영감은 만개하게 된다. 또한, 약물에 대한 접근과 더불어 샌프란시스코 사이키델릭을 알게되고 또한 새로운 창의력의 원천이 된다. 또한 영국에서 한걸음 물러서 보았을 때 모순에 가득차 있는 미국의 현실을 바로 보게되고 그는 잠재된 분노를 찾게된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퍼리언스는 프랑스의 엘비스로 불리던 자니 할러데이의 공연에 참가하게 되고 66년말 첫 싱글 Hey Joe를 내놓는다. 자신의 아내와 달아난 백인 남자를 잡아 죽이겠다는 내용의 노래는 헨드릭스 음악이 지닌 에너지의 원천을 알 수 있게 한다.

펜더스트라토 캐스토와 마샬 앰프의 조합으로 흐느끼는 블루스는 이후의 파격을 예고했다.

이어 발표된 Purple Haze는 이후 하드록의 발전에 이정표가 된 곡이다. 몽롱하면서 충동적인 기타리프에 의해 진행되는 이곡은 블루스의 영역을 넘어 하드록의 방향으로 가고 있음 보여주고 있는 곡이다. 이 곡에 의해 영국의 멜로디 메이커에서 올해 최고의 팝뮤지션으로 선정된다.

67년 6월 몬테레이 팝 페스티발을 통해 미국 무대에 복귀한다. 당시 최강의 스테이지를 연출하던 후를 가볍게 제압하고 최고의 스타로 부각되었다. 다음 날 신문에 ‘지미 헨드릭스 기타와 사랑을 나누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이 때 투쓰 피킹 등 과격한 연주는 물론, 앰프 부수기, 기타 태우기 등 악기 파괴를 통해 청중 들에게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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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익스퍼리언스는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를 발표했다. 이 데뷔 앨범은 미치 미첼의 재즈적인 드러밍과 더불어 지미 헨드릭스의 다층적인 기타 사운드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미 헨드릭스는 이 앨범에서 와와와 퍼즈박스, 유니바이브 스피커등 각종 이펙터 및 녹음기술, 피드백등으로 기타사운드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전의 싱글로 발표된 Hey Joe와 Purple Haze외에 강렬한 기타리프의 Manic Depressions, 폭발적인 리듬의 I don’t live today, 피드백을 통해 사이키델릭적인 감성을 표현한 Third stone from the sun과 힘있는 블루스 넘버 Fire, Foxey lady등 전곡이 기존의 음악적 질서를 파괴하는 도발적인 것이었다.

이어 발표된 Axis, Bold as love에서는 보다 흑인적인 감성으로 접근한 앨범이다. 또한, 싸이키하면서 동양적인 앨범커버도 인상적이다. 두꺼우면서도 그루브함을 끌어내는 Spanish castle magic, 멜론콜리한 발라드 Little wing 등이 인상적이며 전체적으로 전에 비해 스튜디오 기술에 의한 실험성 강한 곡들이 많다.

천재적인 창의력이 절정에 다다른 지미 헨드릭스는 일렉트릭 레이디랜드라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전위파 재즈 연주가들과 더불어 실험적인 녹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발표한 Electric ladyland는 더블 앨범으로 선보였으며 이러한 사운드에 대한 실험성과 재즈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다다른 앨범이다. 전라의 여성 자켓이 물의를 일으켜 마약에 취한 듯한 지미헨드릭스의 얼굴이 그려진 자켓으로 바뀌어 우리나라에는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우선, 데이브 메이슨의 백 보컬이 가미된 흥겨운 리듬의 곡 Crosstown Traffic과 밥딜런의 리메이크로 All along the watchtower가 히트하였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는 트래픽의 스티브 윈우드의 오르간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잭캐시디의 베이스가 가미된 15분의 환각적인 음악적 여행을 펼치는 Voodoo chile이 압권이다. 이 곡은 무디 워터스나 Funkadelic의 Maggot brain등을 연상시킨다. 또한, Long hot summer night에서는 알쿠퍼가 피아노를 연주해주었으며 1983…(A mermal I should turn to be)에서는 크리스 우드가 플룻을, 나중에 밴드오브 집시에 참여할 드러머 버디마일즈가 Rainy days, dream away와 still raining, still dreaming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뮤지션-특히 블루스 뮤지션-들을 참여시킨 것은 트리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었으며 이 앨범에서는 보다 세련되고 풍성한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청자는 보다 깊은 환각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들의 첫앨범이 블루스에서 강렬한 하드록으로 다가간 앨범이라면 Electric ladyland는 흑인의 원초적인 블루스와 깊이있는 사운드에 치중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음악적 관심사는 흑인의 정체성을 찾는데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베이시스트 노엘 레딩과의 불화-마치 크림에서 에릭클랩튼과 잭브루스가 그랬던 것처럼-와 더불어 밴드 해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노엘 레딩과 결별하고 미치 미첼에 3명의 멤버를 보강하여-이 또한 에릭클랩튼과 진저 베이커가 동시에 블라인드페이스에 가입한 것과 유사하다-집시스 선즈 & 레인보우를 결성하여 우드스탁 페스티발에 참여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힘과 더불어 Star spangled banner의 충격적인 연주를 보여주었다.

69년 5월 헤로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고, 인종 문제에 대한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게 되는 등 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그는 그해 여름 뉴욕에 은신하며 블루스 맨과 아방가르드 작곡가까지 동원된 일렉트릭 패밀리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운드에 대한 고민은 그만 너무 앞서갔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실패로 돌아갔던 것으로 예상된다.

흑인 뮤지션들과 같이 하고 싶은 의지에 의해 그는 베이시스트 빌리 콕스와 흑인 드러머 버디 마일스를 포함한 트리오 밴드 오브 집시스를 결성한다. 미 완성으로 남은 블루스 지향적인 밴드 오브 집시스를 마지막으로 남긴다. 또한, 그는 ELP에 참가를 권유받았으나 재즈적 깜보에 치중하려는 그와 다른 멤버들간의 의견 차이로 실패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70년 9월 진통제 과용으로 사망한다. 그의 너무나 앞서갔던 창조력과 현실의 괴리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사실, 지미 헨드릭스는 필자가 처음 들었을 때 바로 다가온 음악은 아니었다. 약간은 탁한 음색과 몽롱한 사운드가 다소 답답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들을수록 그의 음악이 지닌 강렬함에 매료되게 되었고 엄청난 중독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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