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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고전

The Who-폭력과 지성의 아슬아슬한 만남

모드(Mode)

브리티쉬록의 가장 주류였던 리듬앤블루스 밴드들과 구분되는 모드밴드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드는 괴상하고 새로운 식의 옷을 입는 사람들에게서 유래되었다. 모드족의 시작은 우선 4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비밥 재즈를 추종했던 사람들에서였다. 따라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다지 하층 계급이 아니다. 우선, 모드족은 의상 스타일에서 차이를 보였으며 모던이라는 단어가 어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모드는 비교적 젊은 세대 내지 젊은 마인드를 추종하는 밴드였으며 순수한 록커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후(The Who)

후는 모드 밴드 중 군계일학과 같은 탁월한 밴드이다. 후는 브리티쉬 인베이전에서 비틀즈, 롤링스톤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밴드이다. 우선, 후는 모드의 파괴적이고 일탈적인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밴드였다. 사실, 그들이 처음부터 기술적으로 뛰어난 밴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처음부터 모드족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기술적인 부족함을 보다 과격한 스테이지 매너와 요란한 사운드로 커버했다.

후의 트레이드 마크는 고의적이고 인위적인 혼돈이다. 야드버즈와 같이 기술적인 정교함을 추구하는 리듬앤블루스 밴드가 될만한 실력도 없었고-적어도 초기에는-, 오히려 차별적으로 혼돈을 가져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다. 마치 롤링스톤즈가 비틀즈와 대별되는 반항성을 가져왔던 것처럼. 가장 뛰어난 테크니션이기도 했던 드러머 키스문은 당시로는 찾아보기 힘들던 육중한 파워드러밍을 보였다.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던 키스문의 이러한 성향은 존본햄, 코지 파웰 등에 이어져 하드록 드럼의 교본이 되었고 70년대를 통틀어 최고의 드러머중 하나로 군림했다. 몇 개의 코드 밖에 몰랐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트도 비슷했다. 사이키델릭이나 블루스 연주자처럼 영감에 충실하면서 에너지가 가득찬 그런 연주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과격함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무작정의 반발심리를 표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연주에는 당시에 제프벡을 제외한 거의 모든 블루스 연주자에게서도 거의 쓰지 않았던 피드백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그의 피드백은 지미헨드릭스가 의도했던 것처럼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과격한 반항심을 표출하기에는 충분했다. 피트 타운젠트는 또한 악기 파괴도 선구적이었다. 워낙 과격한 액션을 보여줬던 그가 천장이 낮은 곳에서 공연했을 때 기타넥을 부러트렸는데 그 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후 의도적으로 공연의 절정기에 보여주었다고 한다. 보컬 로저 달트리도 팔과 마이크를 뱅뱅 돌리고 과격한 액션을 보였다. 이러한 모든 액션들은 처음에는 우연이었고 그 이후는 의도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모드족들에게 반항의 코드로 다가섰다.

밴드에서 첫 싱글 I can’t explain부터 그들의 본색을 드러냈다. 욕구 불만에 가득찬 모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요란한 사운드로 담아내었다. 사실, 후는 당시 가장 시끄러운 밴드였던 것이다. 기성 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 My Generation, 그리고 무엇보다도 늙기전에 죽고 싶다던가 결정판이었다.

사실, 후의 이러한 과격한 모습에는 청중의 호흡에 따라 그들의 태도를 바꾸는 주도 면밀한 모습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주도 면밀함에 의해 그들은 단순 과격형의 밴드에서 숙달된 작가의 경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뒤떨어져있던 연주력은 점차 숙달된 공연 전문 연주인으로 바뀌어 갔고 단순과격하기만 했던 초기의 곡들에서 앨범 지향적이고 진보적이기까지한 자신만의 록 사운드를 창출해갔다. 사실, 비틀즈나 롤링스톤즈처럼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수많은 다른 영국 밴드들과의 차이점이었던 것이다.

성공적이었던 미국 공략 앨범 Who sings my generation 이후 그들의 앨범은 하나의 콘셉트를 바탕으로 앨범을 만들어갔다. 67년에 발표된 Happy Jack은 이러한 첫 시도였다. 잭이라는 뮤지션과 그의 불성실한 아내에 관한 콘셉트를 바탕으로 3분 남짓한 록에 스토리를 가미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속도와 형식의 마구잡이식 변형을 통해 혼돈을 표현했다. 몬테레이 페스티발의 성공적인 반응을 바탕으로 67년 Thw who sell out을 내놓았다. 전작에 비해 보다 발전된 형태를 보여준 이 앨범에서 런던의 라디오 방송을 패러디하여 곡과 곡 사이에 DJ의 멘트를 삽입하고 광고를 연상시키는 곡들을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연결된 형태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이미 피트 타운젠트는 록오페라를 만드려는 의지가 있었으며 특히 돈에 종속된 기성 세대를 비판하고자하는 의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정한 록 오페라의 시작은 69년에 그들이 발표한 더블 앨범 Tommy였다. The who sell out에서 보여줬던 미니 오페라의 개념을 확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줄거리가 있었고 각각의 곡에서 사건전개와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했다. Tommy의 내용은 불우한 성장 환경과 신체적 장애를 지닌 Tommy가 순수함을 지키고 내면의 삶에 충실하여 결국에는 장애를 극복 핀볼 경연 대회의 챔피언에 오른다는 내용이다. 후의 이 앨범은 많은 이들로부터 예술로서의 가치를 평가받게 된다. 인기싱글 Pinball Wizard에서의 록앤롤, Christmas의 가스펠, Eyesight to the blind의 블루스 리메이크 등 록에서 클래식에 이른 다양한 음악이 이 앨범에는 공존한다. 이 앨범을 바탕으로한 이후의 극적인 라이브도 반응이 좋았다. 이 작품은 영화 및 오케스트라 버전, 그리고 뮤지컬로까지 제작되어 토니상을 받기도 하였다. Tommy의 엄청난 성공 이면에는  이전의 사회에 대한 냉소 및 반항에 대한 포기가 어느 정도 닮겨져있다. 피트 타운젠트가 말했던 것처럼 Tommy는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성스러운 존재였으며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이는 예전의 지지 세력과 어느 정도 결별함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롤링스톤의 데이브 마시는 록에 대한 배신으로 혹독하게 비평했다.

그들의 전성기를 장식하는 라이브 앨범 Live at Leed를 사이에 두고 피트 타운젠트는 Tommy에 이은 거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청중과 더불어 있는 자신들을 주제로한 Life House라는 영화를 기획하려 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의욕이 앞서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실패를 교훈으로 새로운 앨범 Who’s next를 기획하게 된다. 특히 이 앨범에서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신디사이저를 본격적으로 사용, 앨범 전체의 사운드를 유려하게 끌어갔다. 이 앨범을 마치고 피트 타운젠트는 좋은 곡과 아이디어에 기반한 자신들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특히 신디사이저 시퀀스의 도입과 유려한 집시 바이올린 선율이 돋보이는 Baba O’Riley는 Mr.Big이나 Pearl Jam도 즐겨 연주하는 곡으로 최근에는 American Beauty에 삽입되어 영화를 빛내주기도 하였다. 이 외 공연의 절정기 때 항상 연주되는 Won’t Get Fooled Again, My Wife, Behind Blue Eyes와 같이 라이브 넘버로도 손색없는 곡들이 가득하다. 이 앨범은 멤버들의 연주력과 어레인지, 사운드에 대한 접근이 절정에 달한 앨범이다. 각각의 곡은 절묘한 텐션을 바탕으로 초기의 과격한 사운드에서 밴드의 힘이 집약된 웅장하고 거대한 사운드로 탈바꿈되어 있다. 여기서 후는 폭력성과 지성이 교묘하게 결합된 록사운드의 이정표를 보여주었다.

73년 Quadrophernia도 이러한 그들의 사운드가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이 역시 두장짜리 앨범이며 모드족 소년 지미를 주인공으로한 콘셉트 앨범이다. 60년대의 시대상황과 더불어 4멤버의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솔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보다 다듬어진 사운드에서도 그들의 뿌리인 모드족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다. 특히 멤버 네 사람의 테마가 반복적으로 교차되는 타이틀곡이 돋보이며 제임스 브라운의 Night Train, 부커 티 앤 엠지스의 Green Onionemd을 리메이크하여 작품의 완서오들 높이기도 하였다. 이 앨범 역시 토미처럼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후는 이후에도 일정수준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그들의 전성기는 역시 Tommy에서 Quadrophernia에 이르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78년 당대 최고의 드러머 중 하나였던 키스문의 급사후 레드제플린처럼 깔끔하게 끝내지 못했다는 것이 후의 가장 큰 실책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 외의 밴드들

우선, 스몰 페이시스(Small faces)를 들 수 있다. 아역 배우 출신인 스티브 매리옷이 이끌던 그룹으로 모드 그룹 중 리듬앤 블루스 밴드에 가장 접근한 밴드였다. 자극적인 기타사운드와 격렬한 보컬로 Whatcha Gonna Do About It, Sha-la-la-la-lee, Hey Girl, All or Nothing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67년에 들어서서는 애이시드적인 요소가 강해지면서 Here comes the nice, Itchyoo Park 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매리옷이 탈퇴하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는데 제프벡 그룹을 떠난 로드 스튜어트와 론우드가 들어오면서 Faces로 재편 Ooh la la등의 히트 앨범을 내었다.

반면 좀비스는 비트 그룹에 가까웠다. She’s not there로 데뷔한 좀비스는 콜린 불린스톤의 숨가뿐 보컬이 인상적이었다. 68년 Odyssey and Oracle이 상업적으로 실패하자 해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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