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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축구

월드컵과 축구에 대한 몇가지 잡담-1. 펠레와 다른 마라도나

Preface - 이전에 몇몇 유럽리그에 관한 글에 이어 축구에 관한 다소 정치적인 글을 씁니다. 스포츠에 관한 정치적인 글이 자칫 잘못하면 '낭만'적인 개인에 관한 쪽에 빠지다 글마저 감성적일 수 있으므려 그렇지 않으려 얘를 써야할 것 같습니다. 프로스포츠라는 것이 적어도 진보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만, 대중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강력한 촉매제가 되는 것이 사실이며 이는 최근 확실히 느낄 수 있을겁니다-대부분 나쁜 영향이 감지됩니다만. 영화나 대중음악이 그렇듯이 적어도 해석의 필요성은 확실히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아랫글을 쓰게 된 것은 경기막판에 유니폼을 흔들며 너무나 행복하는 신화가 된 왕년의 한 스포츠 스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왕년의 무비스타의 알려지지 않았던 행보를 다뤘던 최근에 개봉한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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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이라는 가정은 소용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습관 중 하나가 다른 시대의 최고를 비교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지단이나 호나우두가 과거의 레전드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을까를 따져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두명의 레전드에 확실히 힘을 실어주는 것이 대세이다. 펠레와 마라도나. 펠레의 경우, 여러 말이 필요없다. 1000여차례 골네트를 흔들었고 세차례의 줄리메 컵을 들었다. 하지만 펠레는 그 이상이다. 브라질과 산토스라는 최고의 팀에서 단순한 골게터를 넘어서 창의적으로 공격의 줄기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축구가 보다 조직적이며 예술적이 되고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의 팬들의 가슴을 휘어잡게 되는 시점의 중심에 바로 펠레가 있다.

 

축구가 충분히 상업화되고 세계화된 시점에서 등장한 마라도나의 위상은 또 다르다. 개인이 조직을 넘어서기 시작한 70년대를 넘어서 가장 거칠고 득점하기 힘들어진 90년에 이르기까지 그 와중에서도 한명의 개인이 경기의 결과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를 순수하게 실력으로 증명한 이가 바로 마라도나이다. 사람들이 축구를 10여년 전 쯤 유행하던 PC게임에서의 원맨플레이로 경기를 잡을 수 있다는 미신을 가지게 한 것이 바로 86년 잉글랜드를 상대로 뽑아낸 마라도나의 두번째 골이다. 인터넷이 있었다면 개똥녀를 충분히 넘어설 발언인 '패스를 하는 것 보다 드리블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에 난 드리블을 한다'는 거만한 발언도 마라도나이기 때문에 사실이 된다. 압박과 패싱이 중요시되는 지금에 있어서도 판타지스타 스타일의 창의적 플레이어가 여전히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 역시 마라도나 때문이다. 물론, 이후 마라도나를 가장 닮은 플레이어였던-하지만 결코 비슷할 수도 없었던-바지오와 오르테가는 저니맨 신세를 면치 못하였지만.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미스테리였다. 가장 거칠었던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90년을 넘어서서는 철저한 패싱머신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은퇴후 움직이기 조차 힘들어 보이는 체형에서 조차 여전히 번뜩이는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사실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곤란한 엄청난 무엇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덴마크 전에서 지단은 뛰지 못하면서도 놀랄만한 볼관리와 리딩 능력을 통해 MOM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마라도나는 그 보다 안좋은 상태에서도 상대방을 긴장하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하지만, 펠레와 마라도나가 걸어간 길은 판이하게 달랐다. 브라질의 체육장관을 맡기도 한 펠레가 FIFA에서 벌이는 큰 행사마저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며 특유의 썰렁한 미소를 흘리곤 한다. 펠레는 적을 안만드는 상당히 정치적인 인물이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미국에서 보낸 것 역시 정치적 행보로 해석이 가능하다. 사실, 펠레의 저주로 불리는 징크스 역시도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더불어 정치적 립서비스의 산물이다. MBC와의 인터뷰 당시 '한국은 16강 갈것이다'라고 불어 한국 축구팬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라. 이와 달리 마라도나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그만큼 FIFA의 철저한 기피 인물이었다.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열린 마라도나 재기전을 한국 정부는 이를 월드컵 유치에 활용하려 했다 FIFA가 마라도나에 보인 거부감을 알고 뒷수습을 하기에 애먹었던 일이 있다. 다시 말해 마라도나와의 친분은 FIFA에게 찍히는 손쉬운 방법인 셈이다.

 

사실, 마라도나는 선수시절 마저도 아웃사이더였다. 그가 전성기를 보냈던 팀은 발전한 공업지역이 아닌 전통적으로 가난한 나폴리를 홈으로 했었다.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 역시 적어도 2차대전 이후로는 늘 2인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심지어 90년 월드컵 당시 자신의 킬패스 하나로 브라질을 물리쳤을 때 브라질을 이겨본 것을 처음이라며 감격스러워 했었다. 또한, 한명의 환타지스타에 볼 줄기를 집중하는 것 역시 시대의 흐름과 철저히 다른 방식이었다. 많은 아웃사이더들이 그랬듯이 선수생활 말년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 시작은 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약물복용으로 추방된 일이었다. 그리스전 바티스투타의 헤트트릭을 주도하며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시작과 달리 마라도나가 추방된 후 아르헨티나는 하지의 루마니아에 역전패 당하며 맥없이 탈락하고 말았다. 사실, 마라도나는 본즈와 다르게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약물을 투약한 적이 없다. 숱한 태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몸의 통증을 잊기 위해 마약을 복용했고 그것 역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FIFA에서 약물복용을 이유로 추방한 것은 단 하나, '축구인 노동조합'을 주도하려는 시도로 인해 손봐줘야할 인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이후, 마라도나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지금의 호나우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운동량이 떨어지면서 폭발적인 에너지는 '살'로 축적되어 보기 흉할 정도로 비만이 되어갔고 약물과 마약의 상처는 2004년쯤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 있어서도 필드를 밟을 때면 다소 놀랄만한 능력을 보여주곤 했다. 마치 말론 브란도의 연기인생이 그러하듯이. 내리막 만 있을 것 같던 마라도나의 인생에 작년 언젠가 부터 큰 반전이 있었다. 위축소술을 통해 50kg을 감량해서 비교적 평범한-하지만 여전히 뚱뚱한-사람의 몸으로 돌아왔고, 미디어에도 조금씩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소식을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미주정상회의에 반세계화 시위가 격해질 때 차베스, 에밀 쿠스트리차와 함께 마라도나가 참여한 것이다. 그의 숙적이던 브라질에 대해 축구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롤라에 대해 '그 역시 나처럼 반미주의자다'라며 친분과 존경심을 표한 것 역시 좀 뜻밖이라 싶을 정도의 정치적 행보라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만신창이가 된 마라도나의 이미지와 달리 아르헨티나에서 마라도나의 위치는 여전히 신적이기에 그의 영향력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반세계화에 대한 동참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결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방탕했던 생활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가 참가했다고 해서 반세계화의 정당성에 힘이 더 실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축구인 노동조합이나 반세계화 그리고 그의 축구 철학과 플레이를 유심히 살아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포착된다. '자유'. 그는 세계화나 자본의 이익에 의해 왜곡되기 이전에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자유의 개념에 충실한 인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고향팀 보카주니어스를 응원하는 모습이나 최근 월드컵의 아르헨티나 시합 때마다 나와 다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요란하게 국기를 흔드는 모습은 이 인간 경호원은 참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귀엽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다른 것을 다 떠나 이 인간은 정말 아이처럼 '축구'를 좋아한다. 어쩌면 마라도나의 경이적인 천재성은 아이처럼 축구를 늘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에게 '노동'인 '축구'가 가장 즐거운 놀이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2006년 6월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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