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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기타등등

클라츠 브라더스 & 쿠바 퍼커션 내한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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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도 한 뮤지션의 내한 공연을 여러번 본 뮤지션들이 있다. 일단 기억나는 뮤지션은 딥퍼플 3번, 드림씨어터 3번, 척맨조니 3번, 팽만식 3번, 허병국 2번, 포플레이 2번, 리릿나워 3번(이건 좀 치사한 카운트), 래리칼튼 4번(포플레이 두번 포함. 진짜 치사한 walrus). 클라즈 브라더스도 여기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 공연에서 느낀 것이 클래식의 엄격한 멜로디가 퍼커션과 만나면서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과정에 주목했었다. 반복적인 비트에 의해 자유로움을 획득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흑인이나 큐반이 만드는 비트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축구 선수들에게서 느낄 수 있듯이 그 바닥 인간들의 탄력은 다른 이들은 도저히 불가능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동작 하나하나가 그렇고 단순한 퍼커션의 두들김도 그렇다. 그 인간들의 타악기 연주는 똑같이 두드리는 동작에서도 매번 느낌이 다르고 갈수록 에너지가 증폭되며 그 에너지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그런 마법이 있다.

 

이번은 오히려 달랐다. 클래식의 멜로디는 '엄격함'보다 '익숙함'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런 익숙함으로 인해 관객은 편안함을 느끼고 공연을 쉽게 느끼게 한다. 하지만, 공연에 몰입되는 것은 그런 편안함과 익숙함보다 낯설음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이 극대화될 때이다. 사실, 피아노의 멜로디가 너무 또렷이 부각될 때는 퍼커션이 없어도 그만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반면, 피아노의 멜로디 마저도 즉흥적인 에너지를 내뿜을 때는 관중은 열광했지만 엔트로피가 무한정 확장되는 상태로 공연을 지속할 수는 없다. 공연은 이런 '익숙함'과 '낯섬'의 숨바꼭질일 수 있다.

 

클라즈 브라더스의 멤버 셋 중 베이스 주자 킬리언 포스터의 역량은 발군이었다. 피아노라는 멜로디 악기와 세계의 타악기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으며 곡의 사이사이에서 리드악기로 부상하는 순발력을 수시로 보여주었다. 역시,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에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 주자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멜로디를 어떻게 부각시키느냐 보다 어떻게 감추느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 멜로디를 지나치게 부각시키면 퍼커션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속박될 수 잇기 때문이다. 드러머의 역할 역시 퍼커션 주자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흑인 쪽에 가까운 콩가와 팀발리스트 주자의 연주 속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매력은 '유머'에 있다. 흑인 만이 낼 수 있는 재치있는 춤동작 뿐만 아니라 드럼의 양면을 동시에 때리거나 드럼 받침대를 치는 등 연주 방식에도 이런 유머는 스며들어 있다. 사실, 이 유머라는 미덕은 클라즈 브라더스 & 큐바 퍼커션이라는 뮤지션 자체의 중요한 코드이기도 하다.

 

앵콜 중에는 관중들-이거이거 여성동만 잔뜩 불렀더구만-을 스테이지로 불러내었다. 마치 림프 비즈킷처럼. 림프 비즈킷이나 클라즈 브라더스나 같이 잘 놀아봅세라는 점에서는 주제가 일맥상통한다. 사실, '흑인만이 낼 수 있는 재치있는 춤동작'이라는 위 문단의 용어는 수정되어야 한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한국 여성의 나비 같은 춤사위는 흑인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이었다. 다소 큰 머리와 다산을 상징하는 다소 펑퍼짐한 신체적 특성이 아니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탄력적이면서 쿨한-정말 쿨했다-춤사위. 이는 펭귄형 백인 여성은 도저히 낼 수 없는 면이 있다. 그 여성동이 왠지 이전에 본적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왠일일까?

 

p.s 한국 여성 재즈 싱어가 '고향의 봄'과 '아리랑'을 불렀는데 사실 아니올씨다. 노래는 좋았지만 뮤지션이 익숙하지 않은 악곡으로 쌈박한 어레인지를 즉석에서 요구하는 것을 무리다. 정말 악곡의 멜로디의 익숙함에 비트의 자유로움이 파묻히는 예를 확인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