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전 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4명의 최전방 공격수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남미와 세리아를 대표하는 호나우두와 바티스투타, 그리고 유럽과 프리미어를 대표하는 앨런 시어러와 데니스 베르캄프. 앨런 시어러와 데니스 베르캄프에게는 98프랑스 월드컵이 마지막 월드컵이었지만 두번의 월드컵을 치룬 지금에 와서야 프로선수로서 은퇴를 하게 된다.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는 최용수였다. 그 역시 최근 은퇴경기를 치루었다. 세명 모두, 90년대 후반 최고였던 그리고 지난 5년간도 상대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스트라이커였다.
시계추를 돌려보자. 앨런 시어러는 당시 최고였다. 그는 영웅이었다. 헤이젤 참사 이후 새롭게 거듭난 프리미어 리그의 최고 선수였다. 그가 뽑아낸 엄청난 득점 레이스. 그리고 별볼있는 없는 팀이었던 블랙번을 두차례 우승시키고 뉴캐슬을 꾸준히 다크호스로 올려놓고 영국 국가대표를 96유럽선수권의 4강에 올려놓은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월드컵을 압두고 무득점 행진으로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주전 골게터의 중책을 맞는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98년 월드컵에서 앨런 시어러의 활약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움직임과 팀 기여도에 대해서는 충분했으나 결정적으로 팀은 16강에서 탈락했고 득점기여도도 미비했다. 진정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wonder한 질주를 선보였던 마이클 오웬이었으며 프랑스 월드컵 이후, 시어러가 은퇴하자 이제는 오웬의 시대가 도래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어러가 은퇴했을 때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오웬의 특출한 능력과 달리 시어러는 최전방 공격수로서 모든 부분에 있어서 팀에 기여를 할 수 있는 밸런스를 갖춘 선수였다. 또한, 상대가 잠구기로 작정했을 때, 왕복달리기를 반복하는 오웬과 달리, 시어러의 득점루트는 다양했다. 다득점이 힘든 유럽국가대표로서 63회 37골이라는 숫자는 상당하다. 더욱 엄청난 것은 리그에서의 득점력. 블랙번에서 169경기 130골, 뉴캐슬에서 278경기 151골이라는 숫자는 믿기 힘든 숫자이다. 지난 15년간 영국의 스포츠 뉴스엔 정말 어쭙잖게 팔을 올리며 신나게 뛰어가는 그의 방가방가 세러모니를 매번 반복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기본기에 충실했다. 질주하는 윙어의 크로스를 간결한 볼컨트롤로 수비수를 따돌리며 대포알같이 박아넣거나 잘라 들어가며 강력한 헤딩으로 마무리 했다. 그는 '캐논'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적합한 선수였다. 발과 머리모두 가장 강력하고 정확한 임팩트를 줄줄 아는 선수였다. 시어러의 페이스는 선수 생활 말년까지 지속되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프리미어 리그의 15년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선수이며 또한 프리미어를 가장 다이내믹하며 공격적인 리그로 만드는데에 일조한 선수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빛나는 업적의 가장 큰 원동력은 성실함이었다. 참 착하게 탈모된 그의 아저씨적인 외모만큼이나 그는 시끄럽기보다는 조용한 선수였고 필드에서 경기력으로 증명하는 선수였다. 베르캄프와 최용수처럼 이런 조용함은 언론이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자국리그의 팬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캄프의 1998은 괜찮은 한해였다. 만개한 그의 기량은 압박과 운동량을 중요시하는 히딩크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특히 지단에 버금가는 그의 볼터치와 볼소유능력은 경기를 쉽게 풀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볼컨트롤이 좋은 남미선수와 달리 그는 그다지 게으른 플레이에는 관심이 없었고 팀의 공수전환 속도를 향상시키는데 그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프랑크 드부어라는 긴 패스에 능한 수비수의 존재감은 한번에 베르캄프 쪽으로 날려줄 수 있었고 베르캄프는 자기가 직접 처리하거나 네덜란드의 윙플레이어가 편하게 풀어갈 수 있도록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은 베르캄프만이 가능한 플레이가 무엇인지를 증명한 시합이었다. 치열한 공방전을 마무리 지은 그 유명한 그리고 아름다운 쓰리터치슛은 그 만의 볼터치와 창의력이 결합된 골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상대 최종 수비라인을 한번에 무너뜨리며 클루이베르트의 발밑에 떨어뜨려준 그의 방석 헤딩 패스 역시 그만이 할 수 있는 플레이었다. 공격 2선에서 공격 흐름을 지휘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골을 터뜨리는 베르캄프 만의 장기는 자국에서 열린 2000년 유로 대회 때 더욱 빛을 발했다. 정점에 오른 클루이베르트와의 찰떡궁합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윙어의 조합인 오베르마스-젠덴이 본격 가동된 시점이기도 했다. 공격수가 넘치는 네덜란드의 경우, 베르캄프가 은퇴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반대. 주요리그 득점왕 4명이 모인 네덜란드임에도 중요한 시점 골을 넣지 못해 월드컵에 진출 못하는 참담한 결과가 빚어졌다. 현대 축구에서 직접적인 득점력은 부차적인 문제며 더 중요한 것은 공격의 흐름을 어떻게 풀어주느냐임을 단적으로 증명한 예가 아닐까?
베르캄프가 아약스를 통해 기술적인 완성도와 우아함을 지닌 골게터로 성장했다면 2선 공격수로서 새로운 개념을 선보인 아스날에서의 베르캄프는 벵거와의 인연으로 인해 가능했다. 가장 재미없고 실용적인 프리미어의 전형적인 경기운영을 보였던 아스날의 역사를 가뿐하게 뒤집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며 조직적이며 재미있는 패스게임에 의한 공격축구를 구사하는 벵거의 아스날로 새롭게 거듭나는데에는 베르캄프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 사실, 베르캄프를 지난 10여년간 최고의 선수로 꼽는 이는 많지 않지만 벵교수님 만큼은 베르캄프가 최고라고 한다. 사실, 벵교수님의 전술에 있어서 베르캄프를 대체할 선수는 그 누구도 없었다. 아스날의 스피드 축구에 있어서 베르캄프처럼 빠르지 않은 선수가 전술의 핵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일 수도 있겠지만 볼을 잘 빼았는 미드필더와 볼터치가 이쁘며 측면으로 부드럽게 연결해줄 수 있는 2선 공격수의 역할은 개인 스피드보다 팀스피드의 향상에 결정적인 중요도를 지닌다. 중요한 순간 중요한 득점도 많이 했다. 사실, 21세기 들어서 베르캄프의 득점력은 크게 저하되었고 앙리로부터 우리에게는 토끼처럼 민첩한 공격수가 필요하다는 비아냥을 들어야했지만 여전히 팀에서는 중요한 선수였다. 베르캄프를 얘기하는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비행공포증이다. 아스날의 유럽 리그 경기마다 늘 이슈는 베르캄프의 출전 여부였다. 기나긴 철도로의 이동시간에도 불구하고 참가할 것인지 여부. 이런 비행공포증으로 인한 변수는 실제로 프리미어 최강 아스날이 유럽무대에서 8강의 벽을 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베르캄프가 최고일 수 있었던데에는 그만의 볼터치와 더불어 창의적인 플레이의 원동력인 탁월한 두뇌에 있다. 축구 두뇌일 뿐만 아니라 실제 4개 언어를 할 수 있는 다른 학습 능력도 발달해 있는데, 어쩌면 이런 천재성이 그에 비행 공포증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또, 98-9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할 당시 FA컵에서 페널티 실축 이후 그는 페널티킥을 차지 않았는데, 이 역시 네덜란드와 아스날이 페널티로 인해 중요한 고비를 넘지 못할 때 아쉬운 대목이었다. 이 역시 그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는 축구선수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이러한 아쉬움에도 베르캄프의 축구 인생은 축복받을만 했다. 밀란3총사의 은퇴공백을 효과적으로 메꾼 국가대표로서의 경력도 화려했으며 시어러가 가공할 득점력으로 프리미어를 공격적인 리그로 만들었다면 베르캄프는 예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프리미어를 보다 재미있는 리그로 만들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직전, 축구 전문가들은 최강의 투톱의 출현에 흥분했다. 황선홍이 최고의 경기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최용수는 특유의 골결정력 뿐만 아니라 팀플레이 역시 눈에 뜨기 시작했다. 실제로 막판 평가전에서의 한국 대표팀의 공격력은 상당히 경쾌한 템포를 유지하고 있었다. 황선홍이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고 예선전 내에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이상윤도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차범근은 멕시코와의 1차전 선발에 최용수 대신 김도훈을 넣었는데 그것 자체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지만 하석주의 퇴장으로 10명이 되면서 결과적으로 악수가 되었다. 최용수의 첫 월드컵도 이걸로 씁쓸하게 끝나야 했다. 벨기에전 헤딩 찬스를 무산시킨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에 남는 대목이나 골게터의 심적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 이 정도의 미스는 일상다반사. 최용수의 선수 인생은 황선홍이라는 최근 20년간 최고의 골게터로 인해 가려진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황선홍이 없었던 그리고 한국 국가 대표가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던 시점에서 최고의 결정력으로 월드컵 무대에 올려놓은 최용수의 활약은 가히 영웅적이었으며 돌이켜 생각한다면 이 당시의 활약이 이후 도약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용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스트라이커다. 비쇼베츠의 올림픽 대표에서 중요한 시점마다 일본을 꺽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특히 축구 선수 출신의 대통령 각하께서 친히 찬사를 표한 일본과의 결승전 코너킥 골??...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K리그에서 활약도 눈부셨다. 94년 데뷔 이후, 상무 입대로 인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뼈 아픈 부분도 있지만 정말 꾸준하게 해줬다. 공격수에게 힘든 K리그에서 146경기 54골도 훌륭한 숫자지만 26개의 어시스트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 달리 그는 득점에만 재능이 있는 선수가 아니라 갖추어진 원톱이었다. 어떤 명문대 물 먹은 기자님께서는 그림까지 그려가며 안정환보다 적게 움직이는 최용수를 비판했지만 그건 공가진 선수만 보는 기자님 눈에만 그렇지 실제 최용수는 상하 좌우 모두 폭넓게 움직이며 최종 수바라인의 옵사이드 트랩을 망가 뜨리는 원톱이다. 또한, 헤딩에 의한 어시스트, 좌우로 빠진 크로스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공격 옵션. 이러한 경기력은 98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이후, 00시즌 안양LG가 우승할 때 빛을 발했다. 무려 14골 10어시스트. 공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살인태클이 난무하는 당시 K리그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스코어. 이동국, 김은중, 고종수가 K리그의 부활을 이끄는 듯 했지만 K리그 최고의 선수는 단연 최용수였다. 공격수에게 유리한 J리그로 갔을 때 그의 득점력은 폭발했다. 일본 언론의 극찬을 받은 부분은 그는 온몸으로 골을 넣을 수 있는 선수라는 점이었다. 특히 그는 두차례에 걸쳐 오른발, 왼발, 헤딩으로 헤트트릭을 했는데, 양발과 헤딩으로 헤트트릭을 하는 것은 어느 공격적인 리그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기록이며 갖추어진 스트라이커임을 증명하는 기록이기도 했다. 최용수는 시어러처럼 캐논 슈터였다. 또한 높은 타점과 정확한 임팩트를 갖춘 헤딩 테크닉이 유상철과 함께 월드 클래스 최고였는데, 그건 프랑스 월드컵 예선 당시 이상윤, 고정운, 서정원이라는 최고 수준의 윙어가 포진한 한국 대표팀이었기 때문에 그의 가치는 더욱 빛날 수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 직전에도 황선홍은 대표팀 원톱으로 그 자신이 아닌 최용수를 꼽았으며 자신은 설기현과 함께 뒤를 받치는 형태를 선호한다고 얘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한일월드컵 직전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드사이와 몸싸움으로 인한 부상으로 그의 상태는 최악이었는데, 미국전 조커로 제 역할을 했지만 팬들의 평가는 무지했으며 냉정했다. 사실, 최용수에게 아쉬운 점은 베르캄프나 시어러처럼 언론 플레이에 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경기장에서 플레이로만 말을 하려 했지만 4년에 한번씩 축구를 보는 곳에서 그건 통하지 않았다. 반면, 그는 팀 케미스트리에는 정말 도움되는 선수였다. 20대 초반 흥분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기도 하였으나 그가 프로리그에서 퇴장당한 적은 없으며 경고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언제나 성실히 연습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최용수를 기억하게 하는 골로 98 프랑스 월드컵 예선에서 5:1로 이긴 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 경기가 생각난다.-카자흐스탄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선취골이 절실한 시점에서 골키퍼 맞고 흐를 때 최용수의 몸 중심은 골과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매섭게 골을 따라가서 우겨넣고 만다. 그다지 멋있지도 않고 운으로 넣은 골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최용수가 아니었다면 넣기 힘든 골일 것이다. 골게터에게만 요구되는 집중력과 투지가 있는데, 최용수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최고였다. 남들이 아쉽다고 땅을 칠 때 최용수의 시선은 항상 공을 따라가고 있으며 다음 플레이를 준비한다. 그는 진정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독수리였다.
사실, 요즘은 스트라이커가 환영받는 시점이 아니다. 미드필더로부터의 압박이 워낙 심해지고 체계적인 트레이닝에 의한 골키퍼의 수비범위가 크게 넓어지면서 스트라이커의 기량으로 득점을 뽑기는 점점 힘들어지고 오히려 2선/3선, 셋피스의 득점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실, 한명의 골게터의 득점을 막겠다고 작정하고 나오면 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 어떤 스트라이커도 부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면서 선수생활을 하기가 힘들어졌는데, 황제 호나우두가 요즘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 정말 할짓 못되는 것이 스트라이커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매년 40경기 이상을 만원관중 앞에서 시합을 하는 유럽 리그 선수들은 그나마 낳다. 그 선수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 받고 사랑받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맞은 몇몇 경기만으로 빛나는 선수의 능력이 바보 취급 받는 것은 지양했으면 하는 간곡한 심정이다.
Alan Shearer(1970/8/13, 183cm, 79kg)
프리미어리그 605경기, 324골
잉글랜드 국가대표 63회, 37골
Dennis Bergkamp(1969/5/10, 183cm, 78kg)
86/87~92/93: 아약스, 리그 185경기/ 103골
93/94~94/95: 인테르 밀란, 리그 52경기/11골
95/96~02/03: 아스날, 모든 대회 423경기, 120골
네덜란드: 78경기 37골
최용수(1973/9/10, 184cm, 79kg)
94~00: 안양LG, 146경기, 54골, 26도움. 경고17, 퇴장 0
01~02: 제프유나이티드/교토퍼플상가/주빌로이와타, 130경기, 77골
06: FC서울, 2경기 0골
대한민국: 67경기 27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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