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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최신작

천리마 축구단 & 어떤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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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환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마이클 무어식 나쁜놈 바보만들기식의 다큐멘터리의 성공과 더불어 다큐멘터리의 성공시대(물론,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작긴하지만)를 상징함과 더불어 이북을 보는 관점의 변화를 나타내는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이다.

대니얼 고든의 두 영화는 송환과 유사점이 있는 영화다. 북을 다른 정말 몇안되는 영화라는 점 외에도 다큐멘터리의 정공법에 충실한 점에서도 그렇다. 마이클 무어나 모간 스펄록 식 다큐멘터리의 문제점은 의도의 옳고 그름과 더불어 '객관성' 자체라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에 있다. 물론, 재미있고 바른 시선을 닮고 있고 대중에게 지대로 다가가는 지혜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반대측의 상당한 역공을 받기도 한것이 사실이다. 또, 설득력 자체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마이클 무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에게는 충분히 통쾌했지만, 다른 생각을 가지거나 긴가민가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또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반면, 김동원의 송환과 대니얼 고든의 두 영화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려는 노력을 영화 러닝타임 동안 꾸준히 보여준다. 물론,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작가의 시선은 투영되기 마련이다. 보는 관객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관점에 따라 작가의 시선은 편향적으로 판단되게 된다. 아마도 이북에 대한 친밀도가 큰 사람이 어떤 나라의 마지막 부분을 봤다면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며 반공 교육에 충실한 이가 봤다면 거북한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반면, 김동원의 송환과 비교한 대니얼 고든의 영화의 차이는 아무래도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져 있다는데에 있다. 이방인의 시선은 보다 객관적일 수도 있고 절대 이해못할 영역을 지니는 한계를 지닐 수도 있다. 대니얼 고든에게 아리랑은 조빔의 보사노바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국적인 음악일 수 밖에 없다.

이 영화가 지닌 힘은 사람에 대한 시선에 있다. 이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웃음과 사랑이 있는 곳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어쩌면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북의 경직성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미국과 대결구도에 너무나 초점을 맞추거나. 66년 미들스브로의 노동자들에게 감흥을 준 이북 축구단의 모습이나 너무나 이쁘게 자라나고 있는 어떤 나라의 두 소녀의 모습은 우리에게나 아니면 다른 국가들에게 북한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들을 보며 과연 자국의 안전을 위해 테러국가를 폭격하는 일에 쉽게 동의할 수 있을까? 변화는 이런 식으로 온다. 사실 자체를 따뜻하고 솔직하게 보여줄 때 나그네는 자신의 옷을 한겹두겹 벗어줄 것이다.

 

-- 천리마 축구단이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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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찬 동 드디어 나다에까지 상륙하다. 암튼, 울 나영씨 자리 앉고 말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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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는 꾸준히 봐주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