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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최신작

애니메이션에서 상상력의 조건-스팀보이 & 로봇

난 상상력 지상주의자이다. 상상력이 빈약하다면 아인슈타인도 비틀즈도 피카소도 플라톤도 하버마스도 핀처도 있을 수 없다. 상상력은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을 가지고 상상하느냐와 어떻게 상상하느냐. 상상력은 몇가지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선 전문적일 수도 있는 지식의 DB구조. 지식이 없다면 상상이란 있을 수 없? 한정된 지식은 한정된 지식만큼 제한적인 상상만 가능하다.

또한, 지식의 DB의 형성 방향은 상상력의 방향을 결정한다. 무조건적인 지식의 양이 상상력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왜곡된 지식의 DB는 오히려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러기에 작가가 어떤 지적 전통에 위치해 있느냐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표현의 자유는 상상력을 극대화될 수 있는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사실, 비슷한 듯 다른 듯 한 두개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공통점을 들자면 산업 사회의 끝자락에 나온 기계 문명과 산업 사회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점이다. 특히 과학 기술이 자본의 집중에 어떻게 기여하느냐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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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 보이는 19세기 산업화의 핵심이었던 증기기관으로 썰을 풀어나갔다. 실제로 증기기관과 관련된 기술은 군수 산업과 연계되어 거대한 자본의 팽창을 이끌어 냈다. 여기서 새로운 과학 기술에 대한 접근 방식-물론, 구린 소재기는 하지만-을 일본 애니식의 과장을 통해 풀어갔다. 3대에 걸친 장인 정신에 대한 예찬은 어쩌면 일본이 산업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원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 기술에 대한 태도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성숙을 기다리며-사회주의자 정운영의 태도와 비슷한 듯-과학기술의 도입에 Culture Lag을 주자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조금은 무개를 실어주는 듯 하지만 늘 그렇듯 아들의 미래에 희망을 두는 변증법?적 결론을 내려줘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서 예언했고 엔딩 크레딧 시 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그 이후로도 군수자본과 결탁한 기술의 매력에 빠져버리고 말았지만. 영화 초반에 산업화 사회의 문제를 작가는 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 적어도 브라운톤의 색감과 터치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표현력의 상상력만큼은 만족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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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은 헐리우드식 쿨한-애니만큼은 여전히 쿨하다는것이 유용한 듯하다-상상력이 돋보인다. 인간아니 로봇을 위한 기술과 상상력을 예찬하는 우두머리와 이윤을 위해 새로운 수요 창출에만 골몰하는 이들 간의 대결구도가 로봇의 플롯이다. 새로운 수요의 창출에 집요할 정도로 집착하고 새로운 기술로 말미암아 소외 계층이 발생하는 것을 그린 부분은 헐리우드에서 찾아보기 힘든 꽤 날카로운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 바닥 애니메이션 특유의 집요한 패러디와 박진감 넘치는 화면 전개는 꽤 흥미롭다. 물론, 결론은 로봇의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바뀌는 헐리우드식의 유치찬란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착한 자본가를 불러내서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아내는 어린이 만화라는 것을 빙자한 순수한 발상은 미국식 자유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유치찬란한 멍청함의 굴례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어짜피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미국 밖의 고통에 대해서는 만화적 해피엔딩을 상상하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