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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만담

[펌]sidof

<매음굴에서 태어나>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권호창

한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과 홍등가의 일상적인 풍경들이 교차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붉은 불빛이 켜져 있는 복잡하고 산만한 거리에 아이들이 등장한다. ‘매음굴에서 태어나’라는 제목이 붉은 색 배경위로 스치듯이 나타나고 곧 캘커타의 홍등가 아이들이라는 부제가 나타난다. 제목에서 말해주는 것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홍등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에 관한 작품이다. (‘매음굴’이라는 말이 성매매 여성들을 비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작품에서도 이 말이 더럽고, 가난하고, 비참한 환경을 강조 - 순수하고 선한 아이들과의 대비효과 -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홍등가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인 로스 카우프만은 홍등가로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진을 통해 그들을 교육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각자 자동카메라를 나누어주고 찍고 싶은 것을 찍어오게 한다. 현상과 인화를 거친 결과물을 두고 아이들과 그녀는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거리와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봐 왔던 것과 느끼고 있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영화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과 그들이 찍은 사진들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아이들이 찍어온 사진들은 그 자체의 이미지로서 아름답다. 풍부한 색체와 대담한 구도, 대상에 대한 순간의 포착이 만들어내는 그들의 사진은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준다. 하지만 이 사진은 단지 아이들의 숨겨진 놀라운 재능을 말하거나 어떤 미지의 것, 원초적인 것에 대한 신기함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찍은 사진은 이 다큐멘터리를 감동적으로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다. 어떠한 형식적인 기교나 멋 부림 없이 그들의 삶에 밀착된 느끼는바 그대로를 표현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또 다른 하나의 감동은 사진 실습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져온 변화에 -물론 이것은 눈에 두드러지는 물질적 변화들은 아니다- 기인한다. 나는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사진 실습’이라기보다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한국에서 정식 교과과정으로까지 포함시키려 하는 미디어 교육과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미디어’에 강조점이 주어졌다면 이곳의 아이들에게 사진 실습은 최소한의 ‘교육’이라는 측면이 더 크다) 자신들의 감정과 느낌과 생활과 관계들을 표현하는 것 자체, 그리고 자신들이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만족감, 그리고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사회적 귀속감과 존재감들이 이 곳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생활의 억압과 황량한 주위 관계와 노동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변화와 사진을 찍는 모습, 그들이 찍은 사진은 홍등가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대비된다. 홍등가 아이들은 가난과 학대와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홍등가에서 태어난 이들은  카스트 제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불가촉천민(달릿. 카스트제도 내에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out-caste로 표현된다)의 신분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세습된다. 그리고 이 신분이 의미하는 것은 비참한 가난과 인간 이하의 대우, 교육과 노동기회의 박탈, 시민적-정치적 자유의 억압,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오는 절망이다.

이러한 홍등가 아이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는가(도움을 줄 수 있는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로스 카우프만과 감독은 계속해서 던진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홍등가를 떠나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스 카우프만은 뉴욕에서 아이들의 사진전을 기획한다. 사진전은  각종 매스컴의 조명을 받아 성공리에 열린다. 홍등가의 아이들은 미국으로 초청되어 그들의 사진을 설명하고 각종 매스컴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뉴욕 전시관에 걸린 아이들의 사진들과 자신들이 찍은 사진 옆에 선 아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흥분과 기쁨을 주었다. 이들의 상황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찍은 사진의 놀라움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아이들이 다른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 기쁨과 흥분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환상을 걷고 냉정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기획된 전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제3세계를 바라보는 제1세계의 외설적 시선 때문이 아닐까? 어떤 원초적이고 이국적 이미지를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도 아이들의 동심의 눈으로 바라본 비참한 매음굴의 풍경’이라는 기획에서 불러오는 알량한 호기심과 선심 쓰기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거둔 일종의 성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면 주목받지 못하는 홍등가의 다른 수많은 아이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전시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홍등가를 떠나서 시내의 학교로 간다. 하지만 학교로 갈 수 없고 교육받을 기회가 없는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매음굴’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다.  

감독과 로스 카우프만의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노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하다. 그들의  헌신적 태도에 지지를 보내지만 이는 문제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나는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일대일로 대응시킬만한 이상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말하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다른 대안적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한 캘커타의 홍등가는 소나가치라는 곳이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 소나가치임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공간의 역사와 성격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더럽고, 위험하고, 비참한 일반적인 ‘매음굴’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소나가치는 1995년도에 있었던 섹스워커(sex worker)들의 거리 공개 시위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이 시위를 기점으로 해서 매춘여성들의 자발적 조직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권익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전 세계 매춘여성들의 상징적 장소가 된 이 곳 소나가치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성매매 합법화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 “Sex-Work is real work. We demand worker’s right.”- 매춘노동은 노동이다.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를 원한다. - 이것이 그들의 구호이다)이 계속되고 있고, 조합에서는 보건ㆍ교육활동을 포함한 자치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활동 때문에 소나가치 지역의 에이즈 발생률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로스 카우프만은 아이들이 에이즈에 감염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이는 그들이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MSC(여성협력위원회)의 보건활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소나가치의 이러한 활동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벗어나야만 할 곳이다. 이곳의 매춘여성들과 어른들 역시 억압자이고 학대자로 묘사된다.

물론 이곳이 매춘여성들의 천국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소나가치에서 매춘여성들의 조직 활동이 이루어낸 성과들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여전히 이곳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문제의 해결이 아이들에게 이곳을 떠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소나가치의 투쟁은 많은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 나는 더 많은 매음굴 아이들의 미래가 이들 손의 사진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노동 합법화와 사회적으로 확산된 매춘 여성들의 노조활동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