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글도 안되는 아이들에게 영어 먼저 써야 인간된다는 요즘이지만, 그래서 인간되기 예전에 포기한 walrus이지만, 가끔은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미국인들-영국인들도 큰 차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하지만-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곤한다. 자신이 소통하기 힘들기에 상대방도 소통하기 힘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소통을 위해서는 많은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다른'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습관을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를 배울 좋은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에 와서 일본어 못하는 것이 자랑도 아니거늘, 그것에 어떤 미안한 감정 대신 너네 왜 이렇게 답답해하는 식으로 처다보는 시선은 결코 유쾌하지는 않다. 영어를 쓰지 않는 다른 유럽인들만 하더라도 적어도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대해 흥미로워하며 같은 점을 발견하려는 태도가 있다. 사실이 미국인들이 그렇다. 감독 역시 시선이 다르지 않을 것이고, 비판할 생각도 없고 굳이 그런 걸 비판하는 쪽으로 영화를 만들어야될 이유도 없다. 그런 시선의 한계를 감안한다면 영화의 모든 설정은 미국인의 시선에서 본다면 상당히 정교하게 사실적이다. 빌 머레이와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근간이 되는 로맨스를 제외하자면. 우띠, 빌 머레이, 니가 먼데 스칼렛 요한슨과 키스하냐?
영화에서 프레임 속에 감정을 담아내는 영화의 재주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서울과 엔트로피 과다로 1,2등을 다투는 도쿄의 풍경이 가진 원색적인 현란함이 예쁘게 담아져 나오면서도 그 속에 담겨진 이방인의 소외와 무언가를 찾는 두 캐릭터의 모습을 정확히 잡아내고 있다. 버스터 키튼의 스톤 페이스와 대적할만한 몇안되는, 그리고 만두 소희와 대적할만한 페이스인 모든 욕정에 초탈한 보살, 빌 머레이의 뚱 표정은 여기서도 특유의 입체성을 내뿜는다. 그런 표정으로 일관하기에 마지막 뜻밖의 기습적인 키스 신은 안타까운 이별 속에서도 후련함과 아련함을 동시에 주는 감정의 선을 만들어낸다. 물론, 욕은 나온다. 빌 멀레이 나쁜 쉐이. 스칼렛 요한슨 역시 아주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더더욱이, 스칼렛 요한슨 정말 이쁘다(다시 생각해보니 진주 귀걸이 때도 정말 이뻤다). 포스터 같은 사진 속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이쁘다고 느껴본 적 없만, 이 영화를 보면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 영화를 BD로 수집하고 싶다는 뽐뿌질이 손가락을 간질간질하게 한다.
p.s. 도쿄의 원색적임 그리고 낯선 곳을 이방인이 되어 여행햐며 붐비는 거리의 사람들을 느끼는 것이 좋은 walrus에겐 사실 '낯섬'을 주는 그 풍경들이 사랑스럽다-도쿄가고 싶다, 서울과 닮아서 서울이 좋아서 더 가고 싶다.
이명세가 말한 절대샷은 이 영화에서는 이게 아닐까?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US, 2004, 102min)
감독: 소피아 코폴라
출연: 빌 머레이, 스칼렛 요한슨, 지오바니 리비시, 안나 페리스
'영화 > 고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란다스의 개 (0) | 2008.02.03 |
---|---|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0) | 2008.02.02 |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0) | 2008.01.31 |
영원한 휴가 (0) | 2008.01.29 |
로마 (0) | 200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