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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최신작

박쥐


박찬욱표 영화 언어의 완성(이라고 하기엔 산만할지라도).

재미가 되었든, 프로파간다가 되었던, 그 효용성이 입증되었을 때 영화를 만든 이는 장인이 되며 더 나아가 영화라는 것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때 한명의 작가가 탄생한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과 시선을 제공할 수도 있으며 통찰력의 깊이가 깊지 않더라도 자신의 시선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화 언어'라는 것을 만들 때에도 그렇다. 아이젠슈타인, 오손웰스, 히치콕은 후자적인 측면에서 두말할 나위없는 지난 세기의 가장 탁월한 작가이다. 위대한 영화의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박찬욱은 이 나라에 누군가가 작가에 가장 근접한 이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떠오를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나는 깐느의 매년 깐느의 트로피를 존중한다. 외국의 어떤 비평가도 올드보이를 가리켜 한국영화로 떠오르는 최고의 재미라고.

박쥐는 그리고 박찬욱은 차갑고 무뚝뚝하다. 만약, 대사의 일차적인 전달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면 박쥐는 박찬욱식 씨니컬한-대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운-B급 개그와 양식화된 비주얼에 절대적으로 의존도가 큰 영화광의 장난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한국적 가치와 잣대에 충실한 상태에서, 그리고 '갈등하는 신부를 파괴시키는 팜므파탈'이라는 공식에 충실하게 영화를 이해하자고 하면 이 영화는 오마주를 빙자한 클리쉐의 모음집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박찬욱의 영화는 서태지의 음반처럼 나름 대중성을 확보하겠고 만에 하나 깐느에서 그럭 괜찮은 평가라도 받는다면 상당한 폭발성을 지니겠지만.

유럽의 작가들이 그랬듯이 극단의 탐미를 지향하는 오디오비주얼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관객들의 거리감의 In&out을 수시로 반복하며서 이를 이해하지 못할 관객들을 향해 박찬욱이 시니컬한 웃음을 던지는 숱한 장면들. 허무 개그처럼 보이는 많은 대사와 설정들이 영화의 막판으로 갈수록 얼마나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다-허무개그에 지나지 않아 보이던 첫번째 장면인 고해성사 씬과 김옥빈의 마지막 대사의 파괴력은, 그리고 흡혈귀 김옥빈의 생과 실존에 대한 환희와 희열은 지금 나의 뇌세포를 파괴시키고 있다. 송강호, 김해숙, 신하균에 대해 끄덕끄덕이라면 영화의 진정 승자는 된장녀 김옥빈이다. 영화 후반부에서의 흡혈귀 태주를 보자면, '제발 된장녀로 남아줘'라는 팬레터를 날리고 싶어진다.

박찬욱은 고다르도 비스콘티도 아니고 한국적인 환경에서 타협할 그이기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어 보이며 박쥐 역시 대단한 깊이에 이른 작품은 아니지만, 두 시간 동안 자신만의 언어로 문자적 내러티브를 훨씬 뛰어넘는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며 다양하게 해석될 텍스트를 제공할 박찬욱은 독보적이다. 봉테일 역시 우리 시대의 소중한 자산이지만 봉테일의 주 소재는 한국적 소시민을 타겟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봉테일의 지향성은 보다 헐리우드 장르놀이에 가깝다는 점에서 박찬욱에 대한 기대치는 늘 Challengable하다. 고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입이 근질근질한 그이지만, 자신의 영화가 가지는 텍스트에 대해서는 GV동안 교묘하게 빠져나올 것 99.9%인 불친절한 찬욱씨-또는 무뚝뚝한 찬욱씨는-가 될 것으로 거의 예상되고 있지만. 아무튼, 제발 카톨릭에서는 박쥐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이 없기를 바란다. 그의 최후는 빠졸리니가 아닌 부늬엘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비아냥거리면서도 생, 존재 그리고 창조의 즐거움을 죽을 때까지 향유했던. 박찬욱이 작가로 기억된다면 박쥐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오빠, 낙원동에서 뵈요~

박쥐(Thirst, Korea, 2009, 133min)
감독: 박찬욱
출연: 송강호, 김옥빈, 김해숙, 신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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