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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기타등등

고란 브레고비치-20140607, LG아트센터



음반과 달리 공연은 뮤지션 자체의 클라스에 따르기 때문에 한번 꽂힌 뮤지션은 계속 찾게 된다. 특히 몇차례 페스티벌에서 보다보면 해외 뮤지션의 다수는 국내건 국외건 2번 이상은 본 것 같고 3번 본 뮤지션도 꽤 되지만 그래도 4번 이상 본 뮤지션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뮤지션이 아니라면 내한이 많지않고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은 한국을 찾는 일이 많지 않고 외국에 가서 본다면 그래도 새로운 뮤지션을 찾기 때문이다. 팻 메스니가 그렇고 본의아니게 뮤즈나 메탈리카가 그런 듯. 오늘 공연까지 고란 브레고비치가 그렇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2005년 첫 내한 때 충격을 주었고 2006년에는 집시 뮤지컬과 일반 공연 두차례를 했는데 두개 다 보고 싶어 두개다 봤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공연을 한번 보게 되면 인정사정없는 쾌락에 다시 찾을 수 밖에 없다.

1년 사이에 3번을 봤기에 조만간에 다시 올지 알았지만 8년이 걸렸다. 결국 LG아트센터에서 3번째 공연. 깊어진 주름에 나이를 느낄 수 있었지만 흰 수트를 입은 고란 브레고비치의 간지는 여전했다. 여러차례 공연을 본 뮤지션의 신선함에 대한 고민은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전 공연과의 차이라면 드럼과 메인보컬을 이전 공연에는 자신과 닮은 잘생긴 젊은 백인 청년이 맡았는데 이번에는 유색인이 맡아 보다 탄력적인 소리를 들려주었다. 베이스드럼에 심볼을 얹은 드럼키트를 전형적인 드럼스틱 대신 물음표처럼 굽은 스틱과 가는 나무가지로 브러시처럼 치며 자연스러운 비트를 내려했다. 이전 공연에는 집시 여성 보컬이 3이었는데 2로 줄었고 한국 남성 성악가들과 스트링을 데려와서 쓰던 지난 공연과 달리 직접 모셔왔다. 

첫줄이 집시 사운드에 충실한 조합(기타의 고란, 드럼&보컬1, 브라스5, 집시 코러스2)이라면 여성으로 구성된 스트링4, 남성 보컬 6)로 구축된 두째줄에서는 클래식한 사운드를 구축했다. 이번에는 클래식한 사운드를 구축할 팀을 직접 데려왔기 때문에 이전 공연에 비해 곡에 대한 이해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록커이면서도 영화음악가로서 고란 브레고비치가 낼 수 있는 사운드적 스펙트럼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연이기도 했다. 스트링의 섬세함과 남성 보컬의 무게감, 집시 코러스가 주는 애수, 자연스러운 드럼과 바이브레이션. 하지만 고란 브레고비치의 밴드 'Goran Bregovic and his Wedding and Funeral Orchestra'가 주는 가장 강력한 쾌감을 브라스의 사운드가 교체될 때에 있다. 섹소폰 주자를 비롯한 각각의 기량도 훌륭하지만 좌측에 배치된 유머러스한 혼과 우측의 파워풀한 트럼팻과 춤을 추는 섹소폰이 교차될 때의 쾌감은 로큰롤 최고의 리프가 진짜로 연주될 때의 쾌감 그 이상을 선물한다. 이 순간의 역동적 쾌감은 메탈리카 쓰루 더 네버처럼 팅커벨이 잡아내듯 정확하게 클로즈업되서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최근 앨범 Champagne for Gypsies만큼 주옥같은 히트곡도 대체로 다 연주되었다. 내일의 슬픔을 알 수 없기에 오늘 술을 마시며 즐기는 집시의 인생처럼, 같이했던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처럼 장엄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와 보잘것없는 우리 생의 결 그리고 지금을 즐기는 경박하지만 소중한 희열들을 하나하나 진짜로 표현하고 공존할 수 있는 음악적 결과물은 정말 소수의 뮤지션만이 성취한 결과다. 샘플을 쓴 비트와 산만하게 진행된 Ya Ya를 까고 싶지만 그러기엔 전체적인 쾌락의 농도가 극강이라. 8년만에 외치는 '돌격'과 더불어 기립해서 달릴 때의 아드레날린은 로큰롤 궁극의 지향점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과 지금에 충실한 음악을 영미권에서는 20세기 흑인에게 간신히 배웠다면 집시들은 태생이 그랬다. 봉준호가 에밀 쿠스트리차와 펠리니를 가리켜 육식형 아티스트라 했는데 에밀 쿠스트리차의 가장 중요한 음악을 한 고란 브레고비치는 육식 부페형 아티스트라할 만 하다. 매번 곡의 디테일을 지시함과 동시에 'in the death car'에서 박수 대신 La la la를 요구하는 노련함은 자신의 넘치는 아드레날린을 도저히 참지 못했던 에밀 쿠스트리차의 공연과 다른 고란 브레고비치의 또 다른 면모이기도 했다. 한시간 가까이 지속된 앵콜의 마지막을 장중한 사운드로 정리하는 것 역시 그런 노련함이 돋보였다.

정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공연장의 분위기. 모두가 일어나서 즐기고 싶었지만 눈치를 안볼 수 없었기에 이런 공연을 공연 막판에서야 서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다시 한국을 찾기를 바라며 다음번에는 야외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록페스티벌이건 재즈페스티벌이건 고란 브레고비치는 우리들을 기립시킬 것이고 다음 공연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