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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야구

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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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는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잘해서가 아니라 사직야구장을 찾은 아저씨들의 담배소모량을 늘여서이다. 사실, 프로에서 기록을 보면 나쁘지 않다. 59승 50패 58세이브, 평균방어율 3.67. 100승을 넘긴 투수가 몇 없는 한국 프로야구의 상황을 보자면 더욱 그렇다. 더욱이 롯데에서 활약한 7년간 대부분의 기록이 세워졌다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렇다. 매년 7,8승 정도와 7,8 세이브 정도를 꾸준히 올렸다는 얘기. 데뷔한 해 10승 7패 10세이브, 롯데가 우승한 해 14승. 그리고 2승 1세이브로 한국시리즈 MVP. 하지만, 데뷔 2년차에 벌써 14승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낸 그였지만 정작 그해에 기억남는 선수는 17승을 나란히 올린 쌍두마차 신인 염종석과 베테랑 윤학길이었다. 지금까지도 염종석은 어깨에 난 수많은 칼자국과 빈약한 타선지원에도 팀의 중심으로 남아있고 윤학길은 100완투의 명예의 전당급 활약으로 최고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박동희는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완벽한 피칭을 보인 염종석의 빛에 가려 한국시리즈 MVP 가 아닌 포스트시즌 MVP가 선정되어야한다는 논란만 낳았다.

 

이처럼 나쁜 성적이 아님에도 '아쉬움'의 기억만 남는 것은 기대에 못미치기 때문이다. 145를 넘기는 투수가 몇없던 시절 150과 엄청난 종속을 뿌리는 그의 폭발력은 가히 센세이션이었다. 세계선수권 최다승과 대륙간컵 최우수 우완투수. 그리고 고교시절 방어율 0에 이르기까지. 사실, 그는 선동렬, 최동원이 되어야할 제목이었다. 지금으로봐서는 놀라운 기록인 10승과 동시에 10세이브를 한것은 신인 때 20승 투수의 탄생을 기대했던 무리한 관중들의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졌다. 사실, 당시는 선발, 셋업, 구원의 개념조차도 없던 때였다. 그럼에도 프로야구 초반 20승 이상을 거뜬히 올렸던 박철순, 최동원, 선동렬의 계보는 한창 선수층이 두꺼워지고 있던 그 당시에도 동일한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사실, 롯데의 프런트는 본인의 의사보다 박동희를 마무리로 더 많이 기용했다. 시즌이 지나면서 선발대신 경기 후반에 나오는 경우가 잦아졌으며 마무리로서도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아쉬운 점은 블로운 세이브가 많았다. 재밌는 부분은 마무리지만 블로운 세이브 이후 승리를 거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쩌면 전형적인 정통우완인 그가 슬로우 스타터란 얘기고 불가피한 사정에 있어서 야기된 잘못된 선수 기용이었다.

 

그의 불안불안 마무리에 대한 일화. 잠실에서 LG와의 박빙의 상황, 상대는 최강 마무리로 기록을 쌓아가고 있던 김용수. 1점을 내주면 경기가 종료되는 상황에서 연이은 볼넷으로 2사 만루. 그리고 3볼을 연달아 내주었다. 도무지 피칭 밸런스가 무너져 짐을 쌓야할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박동희는 살짝 밀어던지는 초슬로우볼-이른바 아리랑볼-을 던졌고 상대 타자의 배트는 사정없이 돌아갔다. 우중간을 시원하게 갈라야할 타구였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최강의 외야진을 구축했던 롯데의 외야의 일원, 이종운은 거의 나르는듯한 다이빙 캐취로 경기 대신 이닝을 종료시켰다. 연장전, 김빠진 김용수를 상대로 빚맞은 안타가 묘한 위치에 떨어지고 김동수를 대신한 백업포수의 위치선정 미스로 결승점. 더욱이 재밌는 것은 연장에서 박동희는 세타자를 아주 가볍게 요리하며 승리를 따냈다는 점이다.  이런 일화에서처럼 롯데팬들의 거칠은 입은 이놈은 세이브하라고 내보내는데 승리가 더많은거야'라는 말을 뱉어내게했다. 여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불운한 일이지만 당시로는 방만한 선수생활로 보이는 그런 상황들, 예비군 훈련이나 목욕탕에서 다치는 그런 것들이 이어지며 '박동희'에 대한 이미지는 굳어졌다. '애물단지'로.

 

지금 생각해보면 선수 박동희가 초대형선수가 되지 못한 것은 자신만큼이나 환경의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선수혹사로 유명한 부산지역 고교야구를 거치고 대학과 국가 대표에서의 혹사, 그리고 선발 마무리 개념이 없던 시절의 혹사에 이르기까지. 박동희는 공만 빠른 선수로 알려져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선동렬의 공반개 슬라이더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바깥쪽으로 정확하게 뿌려되는 패스트볼-롯데 배터리가 전통적으로 지나치게 바깥쪽을 고집하는 경향은 있지만-, 그리고 직구보다 위력적인 폭포스 커브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제구안되는 투수가 세계선수권 최다승가 될 수 있을까? 마무리에서 고질적인 제구불안도 슬로우 스타터였기 때문이었고 더욱이 무릎관절염의 치료없인 계속된 등판은 피칭 밸런스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세계에서 3손가락 안에 꼽혔던 최고의 직구를 가졌던 박찬호가 허리문제로 갑작스러운 난조로운 보인 것처럼, 이런 부상이 있는 상태에서 피칭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워낙 상체 근력이 좋은 선수라 하체가 무너지고도 여전히 빠른 공을 던지고 오랜 경험으로 제구를 나름대로 잡을 수 있었지만. 또, 성실성을 탓하지만 그는 삼성에서 7년동안 고작 7승을 거두는 동안에도 선수생활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35살까지. 그는 그를 비난했던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애증'이 교차하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 슬프다. 정말 성공적인 선수가 세상을 떠난 것보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우리 선수였다. 지겹도록 들은 야유가 정작은 기대와 애정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 세상에 가서라도 기억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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