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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고전

연주상영-안달루시아의 개+황금시대

이전에 오디오비전이란 책을 본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무성영화와 아방가르드는 최상의 궁합이다. 둘다 '어렵기'때문이다. 관객에게 당혹스러운 상황의 피투성을 체험하게 하며 작가는 관객을 실험대상으로 반응을 볼 수 있다.

영화가 끝난 후 박창수 씨는 '건방지게 답해도 될까요?'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소신을 표시했다. 자신의 음악이 무엇보다도 독창적임을 강조했다. CD케이스나 콜라켄을 피아노 현 위에 올려놓거나 조율을 하지 않는 등 실험적인 방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자신의 시도가 나중에야 존 케이지의 시도와 비슷했음을 알았다고 얘기를 했다. 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작곡전공 답게 음의 피치를 찾아가는 그런 섬세한 면모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설명 중 상당 부분은 음악과 영상의 동기가 필요없음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영상의 템포에 동기를 맞추는 것등의 의도적 연계성을 강화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감수성에 기반하는 것이며 이는 예술영화의 실험성에 반하는 것일 수 있다. 음악은 '관계'에서 나온다. 음과 음 사이의 관계, 음색간의 관계, 작가와 소리와의 관계, 음악과 이를 감상하는 청중간의 관계. 영화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영상과 음악은 관계를 맺는데 그건 보수적일 수도 진보적일 수 있다.

필립글라스와 마이클 나이먼의 작품을 다시 봐야겠다. 음의 동기에 집착했던 과거와는 다른 먼가가 보이지 않을까? 마이클 나이먼의 작품은 너무나 유명한 무성영화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다.

 루이스 브뉘엘과 달리의 영화는 이미지의 연속이었다. 어찌보면 이미지의 시대가 된 지금의 선구자적인 예술가가 바로 살바도르 달리이다. 네러티브보다 이미지의 조합을 선택하는 오늘 본 두 영화는 어찌보면 뮤직비디오의 형식과 유사점이 있다. 또 황금시대에서 보여준 억눌린 성적 욕망의 과격한 표현과 종교 및 사회적 굴레에 대안 비아냥거림 역시 상당히 선구적인 접근일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미적 접근은 익숙함에 의한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타파하는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사물의 배치를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의 배치와 달리한다든지, 메틀 형과 B급 영화의 형식이 된 고어적인 이미지의 채용이라든지 불편함을 자극하는 욕망의 표출이라든지 등. 하지만 영화나 음악이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재미'이다. 부뉴엘은 심지어 슬랩스틱 적인 상황의 연출에 의한 재미도 빼먹지 않고 있다.

 

예술적 진보(개인적 진보-사회적 진보 / 형식적진보-주제적진보)에 대한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하 네이버에서

 

- 안달루시아의 개

L.부뉴엘감독.초현실주의화가 S.달리의 협력을 얻어 연출한 전위영화이다. 면도칼로 베이는 눈알, 당나귀 시체를 올려 놓은 피아노, 개미가 들끓는 구멍 뚫린 손바닥 등, 괴상한 영상이 비약적으로 교차하는몽타주로 일관한다. 장면마다 작자의 예리한 감각이 나타난다. 후기전위영화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진다.

 

영화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면도날로 여인의 눈을 베는 그 전설적인 장면을 기억하리라. 그리고 그 장면이 스페인의 원조 영화악동(알모도바르의 악취미는 다 뿌리가 있고, 역사가 있는 거다.) 루이스 브뉴엘과 현대미술사에서 피카소와 함께 가장 유명한 이름인 살바도르 달리의 공동작품인 <안달루시아의 개>에 나온다는 것도 기억할 것이다. 좀 더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현실주의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한때 브뉴엘과 달리는, 그들처럼 현대의 공통 문화유산을 창조했고 그들만큼 유명헸던 로르까와 함께 세기 초 스페인에서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했었고 <안달루시아의 개>는 그 초현실주의 시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에 얹힌 피흘리는 당나귀 머리 같은 뜬금 없어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바로 초현실주의 운동의 영화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안달루시아의 개'의 숨은 의미를 묻지 마라. 자유연상이나 자동기술의 창작 방법론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해서는 더욱 안 된다. <안달루시아의 개>를 분명 영화사의 고전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 영화를 영화 교양의 필수목록 쯤으로 생각하는 그런 관람 태도는 이 영화에 대한 올바른 관람태도가 아니다. 기적같은 일이지만 이 영화는 아직도 우리를 정신나가게 할만큼 웃겨주는 영화다. 애초에 브뉴엘이, 달리가 의도했을 그 웃음을 웃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한 진정한 경의다.

 

-  황금시대

1930년루이스 부뉴엘(Louis Bunuel)이 연출하였다. 데뷔작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1928)를 통하여초현실주의영화의 태동을 알린 그는 평생동안가톨릭교회·부르주아·파시즘등에 대한 반감을 영화적 형태로 표출하였는데 이 작품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데뷔작에 비하면 줄거리가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한 쌍의 연인이 성적 욕망과 종교적인 갈등 사이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이야기로, 연인으로 등장한 가스통 모도(Gaston Modot)와 리야 리(Lya Lys)는 가족들과 교회,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당한 자신들의 성적인 본능을 절박하면서도 광적인 몸짓으로 표현한다. 두 남녀의 꿈속에 들어가기록영화를 찍듯이 시작되는 이 작품은 예수가 난잡한 파티에 참석하는 장면 때문에 각국에서 상영금지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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