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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최신작

영원과 하루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강 모 학형 따라 본 적 있다. 죽을 지경이었다. 너무나 긴 호흡에 자극이라곤 없는. 영원과 하루도 그런 쪽 영화인 듯 싶다. 하지만, 뭔가 이번엔 달랐다.(희생 지금 함 다시 볼까?) 그런데, 사실 타르코프스키 보다 빔벤더스와 더 닮은 듯.
  이 영화는 내 맘속 방랑자의 휑한 마음을 드러내고 어루만져주는 듯 하는 영화다. 발칸의 음악과 영화는 너저분함과 천박함 속에서도 인생을 음미할 수 있는 매력을 지닌 것 같다. 긴 호흡 속에서 '내일'의 의미를 얘기해주고 보여준다. '내일'은 '영원'그리고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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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 브루노 간츠(Bruno Ganz)... 노시인 알렉산더 역
이자벨 르노(Isabelle Renauld)... 알렉산더의 아내 안나 역
아칠레아스 스케비스(Achileas Skevis)... 알바니아 아이 역
데스피나 베베델리(Despina Bebedeli)... 알렉산더의 어머니 역
Iris Chatziantoniou
Helene Gerasimidou
파브리지오 벤티보글리오(Fabrizio Bentivoglio)... 시인 역
Vassilis Seimenis
각본 : 테오 앙겔로플로스(Theo Angelopoulos),토니노 게라(Tonino Guerra),Petros Markaris,조르지오 실바그니(Giorgio Silvagni)
감독 : 테오 앙겔로플로스(Theo Angelopoulos)
미술 : 기오르고스 파사스(Giorgos Patsas),Giorgos Ziakas
음악 : Eleni Karaindrou
제작 : 테오 앙겔로플로스(Theo Angelopoulos),에릭 휴먼(Eric Heumann),Amedeo Pagani,조르지오 실바그니(Giorgio Silvagni)
촬영 :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Yorgos Arvanitis),안드레아스 시나노스(Andreas Sinanos)
편집 : 야니스 시트로푸로스(Yannis Tsitsopou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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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노트
 앙겔로풀로스 읽기
 
  앙겔로풀로스의 스타일은 간결하고 섬세하며 서정적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탁월한 시각적 구도와 쁠랑 세깡스, 이동 촬영 등의 복합적인 카메라 움직임이 결합된 영상으로 표현하여 세계영화계에서 독창성을 인정받고 현대 영화의 새로운 영상미학을 창조해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그는 ‘카메라와 색채, 음악이 모두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최고의 감독이고 심오한 영화언어를 구사하는 그의 작품들은 뛰어난 시와 마찬가지로 매우 감각적인 창조물이다. 때문에 그의 영화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감을 총동원하여 영화의 구조와 색감을 읽고, 카메라 움직임과 쁠랑 세깡스의 리듬을 느끼고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만끽하라!
 
 
 여행. 시간과 공간의 자유로운 구성
 
  우리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지만, 다시 또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화해하기 위해서, 되찾기 위해서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 끝이 있는 곳에 시작이 있다. 우리의 모험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 앙겔로풀로스가 인터뷰에서 인용한 T.S. Eliot
 
  <유랑극단>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은 여행에 기반해 있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지리학적이든, 시간적이든!
 앙겔로풀로스는 여행하는 인물들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현재 시점에 과거를, 환상을 자유자재로 불러들인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의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현재를 역사적으로 조명해가는 방법이다. 그 결과 앙겔로풀로스의 작품은 꿈같기도 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적인 영화가 된다.
 
 
 신화적 서술방식(Mythic Method)
 
  앙겔로풀로스의 조국 그리스는 호머의 나라, 위대한 신화와 비극의 나라이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호머의 ‘오디세이’다. 앙겔로풀로스는 유학시절, 무엇이 나를 그리스인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그 뿌리일까를 더듬는 과정에서 ‘언어’를 발견했고 오디세이를 탐독하면서 신화에서 도출한 추방, 국경, 귀향, 변화 등의 개념을 영화에 활용하였다. <유랑극단>에서 는 아가멤논, 클렘템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라는 이름을 가진 단원들이 등장하고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은 자연스럽게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현실세계를 신화의 구조 속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은, 복잡하고 제멋대로의 카오스 상태인 현대문명의 현상을 꿰뚫어 본질적인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임스 조이스가 택했던 ‘신화적 서술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신화적 서술방식이란 서로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것 같은 현실세계 경험의 파편들에 질서와 형식, 의미를 부여하고 현실세계를 보다 명확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신화의 구조와 상징체계를 활용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앙겔로풀로스는 일련의 작품을 통해 신화적 서술방식을 사용하면서 조국과 그 문화를 탐구하고, 신화는 형이상학적인 성찰의 알레고리로 계속 등장한다.
 
 
 안개 속의 풍경. 우수에 잠긴 조국 그리스
 
  앙겔로풀로스는 풍경의 색깔과 모양을 사용하여 인간의 감정적 굴곡을 절묘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그리스는 여행책자에 나오는 햇빛 찬란한 얼굴이 아니다. 잿빛 안개, 짙은 구름, 스산한 마을, 황량한 정류장, 텅 빈 광장 등을 통해 쓸쓸함이 묻어나는 풍경들은 유럽의 가장자리 나라로서 또한 발칸반도의 한 부분으로서 겪은 격동의 역사를 대변한다. 진한 감청색의 블루톤으로 이어지는 화면은 고된 현실을 적절하게 표현하면서도 작품에 서정성을 더해주기도 한다. <비키퍼>에서도 비에 젖은 길, 낡은 호텔방 등이 분위기의 주조를 이루며 주인공 스피로의 외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사멸된 시간(dead time)을 위한 쁠랑 세깡스(plan sequence ;shot sequence)
 
  앙겔로풀로스의 독창적인 영화세계는 ‘드라마’ 자체에 있기 보다는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과 그 형상화에 기반해 있다. 그는 카메라를 통해 허구적인 드라마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관객들도 함께 응시하게 함으로써 그 상황과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포착한 대상에 대하여 관객들이 충분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줘야 한다. 보통 드라마 중심인 영화에서 불필요하게 여겨지고 말끔히 생략되곤 하는 이런 시간을 앙겔로풀로스는 ‘사멸된 시간’이라고 부른다.
 
 “나는 몽타주의 인위적 방식에 늘 분개했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영화에서 하나의 기다림은 몽타주를 통해 전달된다. 반면에 내 작품에는 몽타주가 없고 효율성을 위해 감소되지 않은 시간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시간의 구체적 의미가 존재한다. 내 영화에서는 사멸된 시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다. 음악이 음향과 침묵의 결합인 것처럼 사멸된 시간은 음악적이고 율동적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미국영화의 율동은 아니다.
 
  내 영화에서 관객들은 인위적인 수단에 의해 조작되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휴지부. 즉 사멸된 시간은 관객에게 이성적으로 영화를 평가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 시퀀스의 상이한 의미를 창조하고 완성하도록 한다. 영향력의 문제에 관한 한, 나는 내가 본 모든 것으로부터 기법을 끌어들인다. 나는 아직도 무르나우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하고 현대 영화들로는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 고다르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영향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오손 웰지의 쁠랑 세깡스와 딥 포커스 촬영이고 미조구찌 겐지의 시간과 영화 밖 공간의 사용 방법이다.“ - 앙겔로풀로스의 인터뷰 중에서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기법들을 사용한다. 롱테이크, 쁠랑 세깡스, 심도가 깊은 촬영(deep focus), 극단적 원거리 샷(Extreme Long Shot), 느린 카메라의 움직임 등이 대표적이다. 쁠랑 세깡스란 하나의 쇼트가 한 시퀀스 구실을 함을 의미한다. 커트와 커트 사이가 일반적인 쇼트의 길이보다 훨씬 길어 공간 내의 미장센을 강조함으로써 시퀀스의 역할을 담당한다. 쇼트를 끊지 않고 연결하는 쁠랑 세깡스는 앙겔로풀로스 영화의 리듬이자 시선의 정직함이다. 이는 길고 복합적이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의 촬영으로 가능해졌다.
 
 
 개인적 체험과 반복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
 
  앙겔로풀로스의 아버지 ‘스피로’는 좌파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촌에게 고발을 당하고, ‘붉은 12월(Red December)'로 불리는 1944년의 크리스마스 무렵에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간다. 그때 앙겔로풀로스는 9살이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수 백구의 시체들 사이로 아버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오지만 이 기억은 유령처럼 그의 영화들을 떠돌아다닌다. <비키퍼>, <시테라 섬으로의 여행>의 주인공 이름도 바로 아버지에게서 빌려온 것. 또 하나의 트라우마는 11살 난 누이 불라의 죽음. <안개 속의 풍경>에서 아빠를 찾아 떠도는 안쓰러운 소녀의 이름이 바로 ’불라‘였다. 무엇보다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알렉산더’. <알렉산더 대왕>에서 그리스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알렉산더는 <안개 속의 풍경>에서는 불라의 어린 남동생으로, <학의 멈춰진 발걸음>에서는 국경을 취재하는 기자로, <율리시즈의 시선>에는 A라는 약자로 앙겔로풀로스이자 알렉산더이고, <영원과 하루>에서는 흩어진 시어를 찾아 헤매는 시인. 마치 각각의 영화에서 소년, 청년, 노년 시절의 단면을 공유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만장일치로 결정된 제 51회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20세기 마지막 거장에게 바친 깐느의 기립박수!
 
  <율리시즈의 시선>으로 제 48회 깐느영화제를 찾았던 앙겔로풀로스는 에밀 쿠스트리챠의 영화 <언더그라운드>에게 아깝게 황금종려상을 빼앗기고 심사위원 대상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가 다시 깐느의 초대에 응했을 때 <영원과 하루>는 채 편집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영화제가 개막한 이후에도 계속 믹싱작업 중이었던 이 최고의 기대작은 결국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그랑프리,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30여년을 줄기차게 자신만의 독특한 영상언어로 영화를 예술의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시네아스트에게 바치는 세계 영화인의 찬사와 경배였으며, 20세기 마지막 거장의 존재를 세계영화사에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 이 영예로운 순간의 주인공인 된 앙겔로풀로스의 11번째 영화 <영원과 하루>는 스스로 영화인생을 돌아본 자화상 같은 작품이기에 이 수상이 더욱 뜻깊다고 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생의 의미를 깨닫는 시인의 초상
 앙겔로풀로스 자신의 자화상같은 영화
 
  죽음을 앞둔 시인 알렉산더. 그가 당장 가야할 곳은 병원이지만 평생을 매달려온 미완성 시를 마무리 짓기 위해 흩어져 버린 말을 찾아나선다. 정작 그 길에서 발견한 것은 어떤 시어보다도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기억! 딸아이의 생일파티로 떠들썩했던 바닷가 집에서의 하루는 아내가 남긴 편지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알렉산더는 그 소중한 순간을 무심히 흘려보냈던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알렉산더는, 평생을 영화에 매달려 온 거장 앙겔로풀로스가 노년에 접어들어 죽음을 생각하고 생의 의미를 짚어보기 시작하면서 그려낸 자화상이며, 그 가운데 깨달은 진리-영화를 통해 삶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영화가 구원받아야 한다는 깨달음-를 보여주는 그의 페르소나이다. 실제로 앙겔로풀로스는 촬영도중 너무나 감정이입을 한 나머지, 촬영 2주만에 잠시 메가폰을 접어두어야만 했다고... 그만큼 <영원과 하루>는 감독의 애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며, 평론가와 언론들은 일제히 <영원과 하루>를 그의 최고작으로 꼽았다.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 <영원과 하루>
 아름다운 그리스 시어가 들려주는 영원한 삶의 비밀!
 
  <영원과 하루>는 삶에 대한 예리한 철학적 성찰이 아름다운 그리스의 시어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는 놀라운 영화다. 특히 알렉산더가 알바니아 소년과 주고받는 아름다운 세 개의 그리스 시어들(코폴라, 세니띠스, 아르가디니)은 알렉산더가 처한 삶의 위기와 고통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누구나 한번쯤 살다보면 마주치게 될 삶의 의문들에 대한 앙겔로풀로스의 대답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미명 하에 예술의 그림자를 좇다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하나. 사랑에 대한 깨달음! 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몰랐을까?
  코폴라 ; 작은 꽃,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의 감정 상태
 소년이 알렉산더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단어 ‘코폴라’는 사랑에 대한 말이다. 생의 가장 크고 위대한 진실은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고 살았던 알렉산더의 뒤늦은 후회와 죽어가는 그를 위로하는 알바니아 소년과의 관계도 이 단어에 투영되어 있다. 어쩌면 인간 삶의 진실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코폴라가 되어주는 것. 안나는 알렉산더의 ‘코폴라’였고 알렉산더는 알바니아 소년의 ‘코폴라’가 된다. 작지만 소중한, 보이지 않지만 위대한 사랑의 존재, 그것이 우리가 영원으로 가는 첫 번째 비밀의 열쇠다!
 
 둘. 존재에 대한 깨달음! 왜 우리는 항상 이방인처럼 느끼는 걸까?
  세니띠스 ; 언제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이방인, 떠도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세니띠스’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말이다. 생명의 위협을 피해 고향을 떠난 소년과 자기의 언어를 찾지 못했다며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헤매이는 알렉산더의 존재가 이 말 안에 요약되어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고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일 뿐이다. 이 깨달음은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고 영원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셋. 시간의 깨달음! 왜 우리는 항상 지난 뒤에서야 깨닫는걸까?
  아르가디니 ; 밤이 너무 늦었다. 인간의 황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
 소년이 떠나기 전 알렉산더에게 마지막 남기는 말, 아르가디니는 시간에 대한 말이다. 멋진 싯구보다도 사랑하는 아내와 보낸 행복한 하루를 영원히 기억하게 된다는 깨달음. 알렉산더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내를 잃은 후다. 언제나 그가 돌아봐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내. 그녀의 사랑을 뒤늦게 알아본 알렉산더는 회한에 젖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되돌리기에 너무 늦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사물은 불멸의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삶과의 이별을 앞두고 알렉산더가 너무 늦었다라고 깨닫는 순간 생의 소중함이 영원한 가치로 승화되는 것!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쁠랑 쎼깡스!
 자신의 영화철학을 특별한 형식으로 전달하는 거장!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트래킹 쇼트와 유장한 쁠랑 세깡스는 자연적인 시간에 대한 존중, 사멸된 시간의 복권, 관객에게 성찰적인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그의 영화철학의 정수인 동시에 영화미학의 정수로 꼽혀왔다. 촬영감독 요르고스 아르바니티스의 끊임없이 이동하는 트래킹 쇼트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카메라 무브먼트로, 몽타쥬가 다 담아내지 못하는 분위기까지 전달한다. 앙겔로풀로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풍경과 분위기, 인물 간의 정서적 흐름을 단절감 없이 전달하는데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
 
  <영원과 하루>는 쁠랑 세깡스를 백분 활용하여 과거는 현재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다는 독특한 시간철학까지 담아낸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러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현재와 과거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마치 시간을 ‘우리가 가지고 노는 조약돌’처럼 다루면서! 이러한 카메라 기법은 단 하루일지라도 행복한 기억은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에서 되살아나고 미래에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한다는 알렉산더의 깨달음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앙겔로풀로스 독특한 영상언어 총집합!
 그리고 주목할만한 변화, 안개 걷힌 풍경!
 
 검은 옷의 노인들, 노란색 우비를 입은 사람들, 세 명의 친구, 안개 낀 바다, 스산한 겨울, 순수와 희망을 상징하는 어린아이, 장례식과 결혼식 장면 등은 앙겔로풀로스의 각인 같은 기호들로 <영원과 하루>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 풍경의 색과 형태를 통해서 인간 내면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앙겔로풀로스는 <영원과 하루>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공간을 다른 풍경으로 그려 각 시공간에서 주인공 알렉산더의 내면의 심리와 변화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어둡고 무겁고 음침한, 소음으로 가득한 회색빛의 도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생의 무상함 속에서 깊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는 알렉산더의 내면 풍경을 투사하는 반면, 따사로운 햇살, 여름, 하얀 백사장, 시원한 바닷소리,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웃음소리는 사랑으로 충만한 과거의 행복한 시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특이한 것은 이 과거 장면의 풍경이 그의 영화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밝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와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인 안개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변화다. 선명한 풍경의 대비로 우리는 현재 그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과거 그는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말로 하지 않아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게 된다.
 
 
 <영원과 하루> 명장면 분석
 
 1. 아내의 편지를 통해 과거과 현재가 조우하는 시퀀스
 30년 전, 안나가 알렉산더에게 썼던 편지를 딸 까떼리나가 천천히 읽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알렉산더와 까떼리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거실의 전경으로부터 알렉산더 쪽으로 이동한다.(트랙킹 쇼트) 화면에서 딸이 사라지고 의자에 앉아 추억에 잠긴 알렉산더로 카메라가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 어느새 편지를 읽던 딸의 목소리는 죽은 아내, 안나의 목소리로 변해있다. “꿈을 꾸고 있나요,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고 카메라는 알렉산더를 클로즈업하면서 그를 따른다. 유혹하듯 하늘거리는 하얀색의 시폰 커튼 뒤로 어렴풋이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듯 알렉산더가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면서 컷! 다음 컷에서 우리는 이미 30년 전의 시간에 와있다. “잘 잤소, 여보?”
 그곳에는 30년 전의 아내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서있다. 알렉산더는 나이 들고 지친 현실의 모습 그대로인데도...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독특한 설정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 대목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히며 ‘관객에게 조용히 최면을 거는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2. 시어를 사모으는 시인 솔로모스의 시퀀스
 시어를 사고파는 솔로모스와 한 여인,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년에게 들려주는 알렉산더를 한 쇼트에 담아낸 <영원과 하루> 최고의 쁠랑 세깡스! 한번의 커트도 없이, 한번의 정지도 없이 카메라는 마치 대기의 흐름처럼 천천히 움직이면서 바다, 여인->마을, 사람들->시인->시인과 여인->고대유적->알렉산더와 소년을 차례로 잡아낸다. 몽타주기법이 이용되었다면 수십 컷은 사용되었을 이 장려한 쁠랑 쎄깡스는 다른 두 공간과 시간을 이음매 없이 완벽하게, 한 쇼트에서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앙겔로풀로스의 탁월한 영상미학이 담긴 최고의 장면! 자연적 시간을 따르되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완벽한 프레임워크로 영화사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기에도 손색이 없다!
 
 
 감동을 조율하는 매혹적인 음악과 효과적인 사운드의 사용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랫동안 앙겔로풀로스와 함께 작업해온 엘레니 카라인드루는 <영원과 하루>에서도 비감에 휩싸인 노시인과 발칸반도의 비극을 감싸안는 매혹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시나리오보다 카메라 움직임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는 그녀는 <영원과 하루>에서도 화면과 환상적인 결합을 이룬 음악을 선보였다. 특히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등 목관악기가 주조를 이룬 이 영화의 메인테마는 애잔하면서도 한 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멜로디로 관객을 사로잡을 것이다.
  사운드 정보에도 귀를 기울이면 더욱 풍성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거리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와 경보음은 도시생활의 피곤함을, 19세기 그리스 어촌 장면에서 들리는 온갖 새의 울음소리는 자연의 정취를 소리를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쇼트가 바뀔 때 사운드가 한 박자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알렉산더가 현실에서 과거로 미끄러져갈 때는 사운드가 먼저 등장하여 유혹하듯 그를 과거로 인도하고 있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전달되는 역사의식
 
  <영원과 하루>는 기존에 앙겔로풀로스가 보여주던 과격한 좌파적 주장이 자리를 감추고 한결 부드럽고 로맨틱한 드라마가 두드러진 작품이기 때문에, 그의 역사인식이 퇴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은유와 상징을 통해 세련되고 완곡하게 자신의 역사철학을 전달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들려주는 19세기 시인 솔로모스의 일화는 그리스 독립전쟁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이자, 그리스 문화, 그리스의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기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말을 찾지 못해 헤메이는 시인의 설정도, 그런 그에게 철학적 해답을 주는 것이 고대 그리스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찍는다고 믿는 이 거장의 날카로운 현실인식은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알렉산더와 소년이 다다른 국경의 섬뜩한 풍경과 두 사람이 마지막 버스여행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색적인 시간은 그의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국경의 철조망, 그곳에 감전사한 채로 매달려 있는 아이들을 비추는 장면은 강렬한 충격을 던지며 직간접적으로 그리스, 알바니아 양국의 피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앙겔로풀로스가 바라보는 현실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알렉산더와 소년이 탄 버스에서 만난 잠만 자는 혁명군의 모습은 ‘역사는 죽지 않는다. 단지 낮잠을 잘 뿐이다’라는 앙겔로풀로스의 생각을 문자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혁명군에 이어 버스에 올라탄 현악 삼중주는 갈등을 뛰어넘는 공존과 화해의 제스추어로 제시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그렇게 찾아 헤메이던 시인 솔로모스가 버스에 남기고 내리는 메시지는 더욱 인상적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원과 하루>에는 눈물의 시대였던 20세기를 넘어 새 시대를 맞이하기를 원하는 감독의 희망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