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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최신작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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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미술작품이 왜 나왔는지를 얘기하는 미술작품 같은 영화
영화 씬 하나하나가 미술 작품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이 어떻게 빛의 예술을 낳았는지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광도와 색감의 조절이 절묘하며 단 하나의 작품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호흡은 느리지만 '농밀하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단순한 스토리 라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몰입될 수 밖에 없고 영화와 미술작품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폭발한다.

감독 피터 웨버: "뇌가 터지도록 섹스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감추거나 다른 데에 쏟아 붓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소녀는 귀를 뚫어 진주 귀걸이를 달았고 베르메르는 명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낳았다.

터질 듯 터지지 않는 로맨스
필름 2.0 2004.08.27 / 김영 기자

영화는 장편 소설의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압축하고 단순화한다. 대신 영화에는 베르메르의 회화가 담은 빛과 색을 유사하게 재현해 낼 수 있는 영상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 그리트(스칼렛 요한슨)는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콜린 퍼스)의 집에 하녀로 들어온다. 그리트는 고된 노동과 눈치 속에 시달리며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집의 생활비를 댄다. 그 가운데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면서 그의 그림을 조금씩 엿보게 된 그리트는 새로운 세계를 알아간다. 욕심 많은 후원자의 주문에 따라, 기센 장모와 짜증 많은 아내, 주렁주렁 딸린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베르메르는 그의 세계에 들어온 어린 소녀를 문득 바라보게 된다. 베르메르는 그리트에게 물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그녀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여기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두 주인공 베르메르와 그리트 사이에 표면적으로 발생한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은 좀처럼 얼굴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손끝이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흠칫 놀란다. 그렇게 숨막힐 듯 팽팽한 공기 속에서 이야기는 그저 끝난다. 그리트를 이젤 앞에 세우는 것만이 베르메르가 표현한 유일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화가 베르메르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저 실패한 로맨스처럼 보일 수 있다. 영화는 그 생애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예술가 베르메르의 삶에 대한, 그것도 아주 짧은 한때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베르메르의 그림 중에서도 인물과 구성면에서 독특한 작품으로 꼽히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어떻게 완성됐을까,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화가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원작자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촘촘히 짜낸 이야기는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영화는 장편 소설의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압축하고 단순화한다. 대신 영화에는 베르메르의 회화가 담은 빛과 색을 유사하게 재현해 낼 수 있는 영상이 있다.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여인들의 일상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세밀한 움직임 속에 담아냈던 베르메르의 화폭은 장면에 그대로 옮겨져 움직인다. 안개가 많은 잿빛 도시 델프트의 풍경과 그 뒤편에서 찬물에 손을 넣는 하층민의 비루한 삶이 설명 없이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면서 무엇보다 생기를 얻은 건, 두 남녀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눈빛과 긴장감이다. 감독 피터 웨버의 말처럼 "뇌가 터지도록 섹스를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감추거나 다른 데에 쏟아 붓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소녀는 귀를 뚫어 진주 귀걸이를 달았고 베르메르는 명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낳았다. 영화에 따르자면 예술의 비밀이란 이런 것이다.
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