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최신작

존 말코비치 되기

개인적으로 존말코비치 되기는 99년 헐리우드에서 나온 영화 중 최고라고 평가하고 싶다. 일단, 너무나 특이한 상황 설정에서 별점 5개 중에 3개는 거저 먹고 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데...소재의 빈곤에 시달리던 헐리우드에서 보기 힘든 참신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관념적인 개념에 대한 상징을 처음 부터 끝가지 집요하게 보여준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는 이러한 점을 처음에 보여주고 중반부 이후에는 맥이 빠지게 된다. 만일, 이 영화에 별 5개를 준다면 나머지 별 두개는 이러한 집요함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주목했던 점은 타인이 어떻게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가였다. 다시 말해 존 말코비치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이며 우리는 타인이 존 말코비치 안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피는데 주력해야한다는 식이다.
나는 여기서 이 영화를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한다. 존 말코비치가 껍질에 지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존 말코비치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능동적인 존재인가 특히 타자의 영향에 대해 종속적이지 않는 절대적인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이다. 여기서 존 말코비치는 인간이 자신을 투영시킬 수 있는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영화에는 지속적으로 인형극이 나온다. 특히 서두 부분의 고뇌하는 인형의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다. 이는 마치 주체성을 상실한 실제 인간의 고뇌를 보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7.5층
존말코비치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는 7.5층이다. 왜 하필이면 .5층에 존말코비치로 들어가는 통로를 두었을까? .5란 7층도 8층도 아닌 경계지점, 즉 두가지 개념을 구분하고 정의하는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다. 존말코비치라는 육체와 이에 들어갈 의식의 경계지점을 상징하는 것이다. 7.5층으로 가는 방식도 다소 독특하다. 삽으로 엘리베이터를 찔러서 여는데 우리가 원하는 범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이처럼 비정상적인 일탈에 의해야만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성행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는 손이 빠르다는 이유로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맏게된다. 이처럼 우리는 자아실현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사회에서 요구되는대로 던져지는 것이다.

존말코비치의 뇌속으로 가는 출구
존쿠삭은 떨어진 문서를 줍다가 우연히 존말코비치의 뇌속으로 가는 입구를 발견한다. 여기서 보이는 입구는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일단, 연상되는 것이 태아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출구인 자궁과 또한 플라톤 식 형이상학적 비유에 빠지지 않는 축축한 동굴의 이미지이다. 이는 한 자아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의미한다.

왜 존 말코비치인가
여기서 존 말코비치는 유명한 배우로 나온다. 존 쿠삭이 인형 안에 자기의 영혼을 투영시킨 것과 달리 존 말코비치는 자기의 육체에 직접 서로 다른 캐릭터 더 나아가 영혼을 표현해야한다. 사람들은 존 말코비치를 유명한 배우인 걸로 기억하지만 실제로 어떤 배우인지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존 말코비치의 명성은 실제로 존 말코비치의 정체성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않는 것이다.

맥신을 축으로한 삼각관계
존 말코비치 안에 부부가 서로 돌아가면서 들어간다는 묘한 설정이다. 서두부분만 하더라도 부부사이는 문제없어 보였지만 사실 이는 결혼이라는 형식 내지 사회적 관습에 억눌려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존 말코비치의 몸 안에 카메론 디아즈가 들어가면서 카메론 디아즈는 이제껏 못해봤던 경험 그리고 존 말코비치의 몸 안이라는 도덕적 방어기제에 의해 자신의 새로운 성적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존 말코비치라는 육체 안의 두 자아는 시간적 갭을 두고 서로 싸우게 된다. 이는 존 말코비치라는 대상에 서로 들어가기 위해서 싸우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존 말코비치 내에 있는 서로 다른 자아가 다른 행동의 양식을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존 말코비치가 본 존 말코비치
존 말코비치가 존 말코비치 안에 들어갔을 때는 어떨까, 이 영화에서는 보이는 것이 존 말코비치 뿐인 희한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각각의 존 말코비치는 서로 다른 경험에 의해 형성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존 말코비치가 봤을 때는 정말 악몽같은 상황인 것이다.

이에 대한 존 말코비치의 태도
사실, 여기서 존 말코비치의 반응은 정말 의외이다. 자신의 자아를 타인이 지배하는 그런 악몽같은 현실에서 그는 이를 막기 위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독립적인 자아가 그를 지배하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오히려 자기 스스로가 타인의 자아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또는 자신 속에 투영된 타인의 자아를 스스로 제거할 수 없는 독립적인 자아의 허구성 내지 무기력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존 말코비치를 인형으로한 인형극
존 말코비치의 직업, 배우 특히 진정한 배우는 자신의 자아 속에 내재된 타인의 자아를 표출해야한다. 존 말코비치 속에 들어간 존 쿠삭은 자신이 인형극 속의 인형에 자신 속에 내재된 다른 왜곡된 자아-특히 극 시작의 외설적이지만 탁월한 인형극을 상기하라-를 존말코비치라는 육체를 통해 표출한다. 이는 존쿠삭이 아니라도 존말코비치가 이전부터 연기를 하던 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존 쿠삭의 존말코비치 되기, 존 말코비치 속의 다중적인 자아
처음에 15분씩 들락날락 거리던 수많은 자아와는 달리 영화의 중후반부 이후 존 쿠삭은 존말코비치의 육신을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는 존 말코비치의 육신으로 옮길 계획이던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는데…결국은 맥신의 납치를 통해 존 쿠삭의 자아는 빠져나오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자아가 존 말코비치를 지배한다. 이는 한 인간을 지배하는 여러 자아 중 가장 우세한 자아와 그 외 수많은 자아간의 대결 구도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성장과정에서 굳어지는 한 인간의 자아의 형성과정에 비유할 수도 있다.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
맥신을 사랑했던 카메론 디아즈는 맥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총을 쏘며 쫗기 시작하는데 우연히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존 말코비치의 무의식은 학교에서 놀림받고 소외받는 점점 왜곡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의식 역시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소통-특히 왜곡된 소통에 의해-형성됨을 알 수 있다.

카메론 디아즈의 아이 속에 내재된 존 쿠삭의 자아
맥신은 카메론 디아즈에게 자기가 임신한 아이가 존 말코비치 속에 카메론 디아즈가 들어갔을 때의 아이라고 말하며 용서를 빌고…

그러나, 맨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예상을 깨고 아이의 자아 속에 존 쿠삭의 자아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게한다. 물론, 존 쿠삭이 죽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결국, 15분간도 존 말코비치의 자아를 완전히 지배한 것이 아니며 여러 자아, 특히 존 쿠삭의 자아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는 다층적이며 순수하게 인식될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수영장 속의 아이가 본 세상
수영장 속의 아이, 관객들은 아이의 곁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고 아이가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거리를 두고 보게 된다. 이 또한 결국 소통을 통한 자아의 형성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영화 > 최신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드 투 퍼디션  (0) 2004.10.07
프리다  (0) 2004.10.07
더 팬  (0) 2004.10.07
파이트 클럽  (0) 2004.10.07
화성침공과 혹성탈출  (0) 2004.10.07